지난 2016년 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린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지니 로메티 IBM 최고경영자(CEO)와 단독 회동을 가졌다. 청바지 차림에 티셔츠를 입은 이 부회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편한 자세로 로메티 CEO와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정보기술(IT) 분야 이슈를 공유하고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최첨단 반도체 공정 등 사업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7일(현지시간) IBM은 차세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인 ‘POWER 10’의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긴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그간 IBM과 유지해온 긴밀한 관계가 이번 물량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IBM은 10년 넘게 반도체 공정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계약을 비롯해 생산 분야 협력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IBM이 이날 발표한 ‘POWER 10’에는 IBM의 기존 및 신규 특허 수백여개가 적용됐다. IBM 제품군 중 극자외선(EUV) 기반 7나노 공정이 적용된 것도 이 제품이 처음이다. IBM 서버용 CPU의 진화를 상징하는 제품인 셈이다. 무엇보다 기업용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 확대를 노리는 IBM 입장에서 ‘POWER 10’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제품이다. IBM이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제품의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긴다는 것은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사업의 경쟁력이 입증된 셈이다.
삼성전자는 ‘POWER 10’의 양산을 이 부회장이 지난해 4월 선포한 ‘반도체 비전 2030’의 가시적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 달성을 위한 첫 단추인 EUV 기반 초미세 공정 기술에서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4월 업계 최초로 EUV 공정을 적용한 7나노 제품을 출하했으며 올해 2·4분기에는 5나노 공정 양산에 돌입했다. 성능과 전력 효율이 개선된 5나노·4나노 2세대 기술 개발에도 착수한 상태다. 전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7나노 이하 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업체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두 곳에 불과하다.
삼성전자는 또 모바일, 고성능컴퓨팅(HPC), AI, 전장 등 다양한 분야로 초미세 공정 기술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이달에는 업계 최초로 7나노 기반 시스템반도체에 ‘3차원 적층 패키지 기술(X-큐브)’을 적용한 테스트 칩 생산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삼성전자는 2017년 파운드리사업부 출범 이후 올 2·4분기에 분기·반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 삼성전자는 EUV 기반 최첨단 제품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평택캠퍼스에 파운드리 생산시설 투자를 결정하는 등 경쟁력을 지속 강화해나갈 방침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사업에 애정을 쏟고 있다. 올 2월에는 화성사업장을 찾아 올해 본격 가동을 시작한 EUV 전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직접 살펴보고 직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지난해 우리는 이 자리에 시스템반도체 세계 1등의 비전을 심었고 이번에 긴 여정의 첫 단추를 끼웠다”며 “이곳에서 만드는 작은 반도체에 인류사회 공헌이라는 꿈이 담길 수 있도록 도전을 멈추지 말자”고 당부했다. 6월에는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개발 로드맵과 공정기술 중장기 전략을 점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