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패권 전쟁 <상> 희비 엇갈린 미중 반도체
엔비디아 ARM 인수로 美 글로벌시장 입김 더 세져
SMIC 제재까지 현실화땐 中 반도체산업 뿌리째 흔들
AP설계 활용 막으면 스마트폰 사업까지 무너질수도
“미중 반도체 패권전쟁에서 미국이 승기를 잡았고 중국의 반도체굴기는 앞으로 휘청거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15일부터 강화되는 미국의 중국 스마트폰 업체 화웨이 제재와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업체 엔비디아의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회사 ARM 인수와 관련해 이같이 말했다.
그간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시장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런 가운데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의 화웨이 수출길이 15일부터 전면 차단되고 미국 엔비디아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 시장을 장악한 ARM을 품에 안으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또 다른 공룡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업계에서는 미국의 화웨이 제재와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역사적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미국은 화웨이 제재로 잠재적 경쟁자인 중국 반도체 기술의 싹을 자르는 동시에 엔비디아를 통해 기존 GPU 시장 외에 모바일 AP 설계 시장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반도체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반도체굴기의 한 축을 담당하던 화웨이가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고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반도체굴기에도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당장 화웨이는 15일부터 전 세계 반도체 업체로부터 미국의 소프트웨어·장비를 사용해 만든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그동안 화웨이는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스마트폰의 두뇌인 AP를 설계하고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에 생산을 맡겨 모바일 AP를 공급받아왔다. 하지만 지난 5월 미국 정부가 화웨이가 설계한 반도체를 미국의 기술과 장비를 사용해 만들지 못하도록 하면서 TSMC는 화웨이 반도체의 생산을 접었다. 이에 화웨이는 TSMC 대신 대만 미디어텍으로 주문을 옮기는 한편 자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우회전략을 모색했다. 화웨이의 설계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임직원들을 중국 칭화유니그룹 자회사 UNISOC로 대거 이동시켜 UNISOC가 AP를 설계하고 이를 칭화유니그룹의 반도체 공장에서 제작하는 방식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중국 칭화유니그룹도 미국의 장비와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데다 삼성전자(005930)와 TSMC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져 화웨이에 공급할 제품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대한 제재마저 검토하고 있다. TSMC와 거래가 끊긴 화웨이가 자국 업체인 SMIC로 주문을 몰아줄 가능성이 있어서다. 14나노 공정을 주력으로 하는 SMIC는 내년 7나노 공정 도입 계획을 밝힌 상태지만 미국의 제재가 현실화하면 7나노 공정 진입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화웨이에 이어 SMIC까지 제재할 경우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이주완 포스코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직 미국이 중국과의 반도체 기술 패권전쟁에서 승리를 점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문제는 앞으로 미국이 어느 정도의 강경책을 펼치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만약 미국이 SMIC까지 제재한다면 중국의 파운드리 사업을 건드리는 것이고 중국 반도체 산업은 손발이 모두 묶여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한 뒤 미국 정부가 ARM의 AP 설계를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활용하지 못하게 할 경우 반도체는 물론 중국의 스마트폰 산업까지 무너질 수 있다. 삼성전자와 미국 퀄컴, 중국 하이실리콘 모두 ARM의 설계를 사용해 스마트폰용 AP를 만든다. 다만 삼성전자와 퀄컴은 ARM의 기본 설계에 자체 설계 기술을 추가해 독자적인 AP를 만드는 반면 하이실리콘은 ARM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차이가 있다. 하이실리콘의 AP 설계 능력이 삼성전자와 퀄컴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는 얘기다.
김종선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한 후 중국 기업에 AP 설계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이를 자체 개발해야 하는데, 중국의 기술력을 고려할 때 ARM을 능가하는 AP 개발은 불가능하다”며 “화웨이가 자체 AP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다른 중국 기업까지 AP 공급이 끊기게 되면 중국 전체 스마트폰 시장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재용·전희윤기자 jylee@sedaily.com
엔비디아, ARM 주인되나...‘메가딜’이지만 경쟁당국 심사가 변수
성사땐 단숨에 절대강자 부상
독과점 이유로 불발 가능성도
반도체 기술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경쟁이 불붙은 가운데 엔비디아와 ARM이 체결한 초대형 인수합병(M&A)은 요동치는 반도체 산업 지형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이번 M&A에 대한 주요 정부의 기업결합 승인이 최대 고비로 남아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경쟁사인 엔비디아가 ARM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대비에 나섰다.
14일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시스템반도체 전문기업 엔비디아가 영국의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400억달러(약 47조4,000억원)에 인수한다. 매각은 빠르면 오는 2022년 3월께 마무리될 것으로 점쳐진다. 젠슨 황 엔디비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진행된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미래에는 인공지능(AI)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컴퓨터가 오늘날의 인터넷보다 수천 배는 큰 사물인터넷(IoT)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라며 두 회사의 결합이 시대에 걸맞은 기업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황 CEO의 포부대로 업계에서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자랑하는 ARM의 노하우를 단박에 확보하게 된 엔비디아가 경쟁사인 인텔이나 삼성전자 등을 누르고 ‘절대 강자’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ARM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에서 저전력 반도체 설계기술로 이름을 떨친 만큼 저전력 반도체 수요가 높은 AI·데이터센터·사물인터넷(IoT) 등 미래산업 분야에서 엔비디아의 힘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현재 엔비디아는 게임시장을 겨냥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사업과 AI에 기반한 데이터센터 솔루션을 주력 매출로 삼고 있다. 삼성전자와는 경쟁사(시스템반도체)이면서도 협력사(파운드리)인 복합적 관계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ARM 인수로 흔들리고 있다. 그간 중립을 유지해왔던 ARM이 엔비디아라는 주요 플레이어 아래로 들어가면 ARM의 설계에 기반한 삼성전자의 AP 기술이 유출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도 소프트뱅크가 4년 전 ARM을 인수했을 때와 달리 엔비디아는 현재 ARM 고객사들과 경쟁관계에 놓여 있어 사업적 충돌 이슈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날 미디어 콘퍼런스에서도 애플·퀄컴 등 기존 고객과의 관계설정이 화두로 떠올랐다. 황 CEO는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반복했다.
한편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바꿔놓을 엔비디아의 초대형 M&A는 각국 경쟁당국의 승인을 넘어야 한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나 한국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두 회사의 결합이 독과점을 형성할지를 따져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앞서 공정위는 지난 2016년 10월 반도체 계측장비 업체인 KLA텐코와 공정장비 업체인 램리서치 합병 당시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 아래 시정조치를 내렸다. 반도체 설계·제조 단계를 고려할 때 수직적 결합에 가까운 엔비디아와 ARM의 M&A 역시 규제에 발목이 잡힐 여지가 있다. 이석준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는 “불승인 여부를 현시점에서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각국 정부가 반독점법 등을 이유로 기업결합에 제동을 건다면 계약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번 기업결합으로 관련 시장의 경쟁이 얼마나 제한받느냐에 따라 각국 당국의 판단이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사법리스크에 묶여...‘ARM’ 군침만 삼킨 삼성
100조 훌쩍 넘는 실탄 쥐고도 관망만 하다 인수전 참여 못해
ARM이 삼성전자가 아닌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품에 안기자 반도체 업계에서는 ‘아쉽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4월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에서도 1위를 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밝히자 당시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대형 인수합병(M&A)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TSMC·퀄컴·인텔 등 기존 시스템반도체 강자들을 10년 안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M&A가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100조원을 훌쩍 넘는 삼성전자의 현금보유액도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는 실탄이었다.
하지만 삼성의 사법 리스크가 결국 삼성전자 M&A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나온다.
먼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까지 삼성전자가 네덜란드 전장 반도체 기업 NXP를 인수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지만 쏙 들어갔다. 지난해 마무리될 줄 알았던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해를 넘기며 M&A 추진동력이 약해졌다는 지적이다. 실제 삼성의 마지막 대형 M&A인 미국 전장 업체 하만 인수는 이 부회장이 구속되기 전인 지난 2016년 추진돼 2017년 마무리됐다.
이런 와중에 올 7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으면서 삼성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내 관망세로 돌아섰고 결국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가중되며 총수의 결단이 필요한 대규모 M&A 결정이 지연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은 당장 M&A보다는 파운드리사업부 등의 자체 경쟁력 확대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반도체 시장에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대형 M&A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