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같은 순간 스피드와 정교한 드리블, 깔끔한 골 결정력은 요즘 ‘월드클래스’ 공격수의 공통분모다. 손흥민(28·토트넘)은 여기에 더해 두 가지 차별화한 능력도 지녔다. 첫 번째는 양발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것. 한쪽 발에 치우치지 않고 오른발·왼발로 넣은 득점이 꽤 비슷하다. 두 번째는 내구성이다. 일단 부상을 잘 당하지 않는다. 어쩌다 다쳐도 금세 회복해 부상 이전의 기량을 보여준다.
유럽 빅리그에 데뷔한 지난 2010~2011시즌부터의 부상 차트를 보면 10줄이 채 되지 않는다. 독일 함부르크 시절이던 첫 시즌에 발 골절상으로 9경기를 거른 게 지금까지 부상으로 인한 가장 긴 이탈이다. 레버쿠젠에서의 두 시즌 동안은 아예 부상 결장이 없었다. 이런 내구성을 인정받아 2015~2016시즌 잉글랜드 무대에 진출한 손흥민은 토트넘에서도 첫 시즌 발 부상으로 7경기, 지난 시즌 팔 부상으로 6경기를 거른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부상이 없다. 하체를 다친 것은 이번 햄스트링(허벅지 뒤 근육) 부상이 입단 후 겨우 두 번째였다.
이번 부상은 꽤 위험해 보였다. 손흥민은 런던에서 불가리아·사우샘프턴·북마케도니아를 오가며 11일 동안 4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뛴 끝에 지난달 28일(이하 한국시간) 결국 탈이 났다. 일반적으로 회복이 더딘 햄스트링 부상이라 최악의 경우 10월 내 복귀가 어렵다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손흥민은 5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4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에 멀쩡히 선발 출전해 73분간 2골 1도움으로 6대1의 기록적인 대승에 앞장섰다.
손흥민은 이날 멀티골로 유럽 빅리그(정규리그) 100골(299경기)을 채웠다. 차범근(308경기 98골·전 수원 감독)을 넘어선 아시아 신기록이다. 챔피언스리그 등을 포함한 유럽 무대 공식경기 득점은 142골로 차범근의 121골을 이미 훌쩍 앞질러 있다.
사우샘프턴과 2라운드에서 혼자 4골을 폭발했던 손흥민은 이날까지 리그 득점을 6골(4경기)로 늘렸다. 이대로면 개인 한 시즌 최다인 2016~2017시즌의 리그 14골 경신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아직 이르지만 EPL 득점왕 등극이라는 꿈같은 일도 어쩌면 현실이 될 수 있다. 손흥민은 현재 도미닉 칼버트르윈(에버턴)과 함께 득점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다. 단 9개의 슈팅으로 6득점을 만들어냈고 50분당 한 골씩을 뽑았다. A매치 일정으로 인한 리그 중단 덕에 꿀맛 휴식을 갖게 된 손흥민은 오는 18일 웨스트햄전부터 다시 달린다.
부상 이후 1주일 만에 돌아와 BBC 선정 경기 최우수선수(MVP)에 뽑힌 손흥민은 “제 햄스트링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며 “이런 빅게임에는 꼭 출전해서 팀을 돕고 싶었다. 잘 관리받으면서 열심히 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맨유 출신인)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곳이라 이곳에서의 맨유 경기를 많이 봐왔는데 그런 곳에서 6대1로 맨유를 이긴 데 대해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손흥민은 1대1이던 전반 7분 해리 케인의 도움으로 왼발 역전 결승골을 터뜨렸다. 달려 들어가는 손흥민을 향해 케인이 프리킥을 재빨리 처리했고 손흥민은 특유의 스피드로 수비 2명을 통과한 뒤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골망을 갈랐다. 전반 30분에 측면에서 케인의 추가골을 도운 손흥민은 7분 뒤 세르주 오리에의 낮은 크로스를 감각적인 오른발 돌려놓기로 마무리해 4대1을 만들었다. 유로파리그를 포함한 손흥민의 시즌 전체 공격 포인트는 10개(7골 3도움)가 됐다. 토트넘은 리그 2승(1무1패·승점 7)째를 올렸고 전반 29분 앙토니 마르시알의 퇴장으로 10명이 싸운 맨유는 2011년 10월 맨체스터 시티전 이후 9년 만에 다시 1대6의 굴욕을 맛봤다. 이날 디펜딩 챔피언 리버풀도 애스턴 빌라에 2대7로 완패해 체면을 구겼다. 리버풀의 2대7 대패는 57년 전에도 있었는데 당시 상대가 토트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