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덤을 파도 제대로 팠구나 싶었죠.” 무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50년 베테랑 배우에게도 ‘난제(難題)’였다. 부담감에 악몽을 꾸고 가위에도 눌렸다. 오는 22일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초연하는 연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무대에 오르는 배우 정동환에게 이번 작품은 1969년 데뷔 후 첫 1인극 도전이다. 최근 안양 성결대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그동안 그가 보여준 무대처럼, 그럴듯한 포장 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자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믿음은 분명합니다. 내가 이번에 잘 못해도 후배들이 도전할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는 믿음요.”
“무덤을 팠다”는 말마따나 그야말로 ‘어려운 작품’이다. 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 7번째 작품인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는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각색해 신과 인간 구원의 문제를 그려낸다. 정동환은 신처럼 되고 싶은 파우스트와 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려는 메피스토펠레스, 냉소적 이성주의자 이반과 따뜻한 신앙심의 소유자인 동생 알료샤, 대심문관을 모두 혼자 연기한다. 상반된 입장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주요 캐릭터는 물론이요 극 중 등장하는 악령까지 연기하며 총 1인 6역을 소화해야 한다. 가위에 눌렸다는 고백이 대배우의 겸손만은 아닌 셈이다.
“의상이나 소품 등 인물을 바꾸는 장치가 있겠지 싶었어요. 나진환 연출이 뭔가 매직(마법)을 부리겠지 했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웃음)” 하나로도 어려운 작품 둘을 엮은 데다 대사 역시 신학·철학적 논쟁으로 가득하다. 나이를 뛰어넘어 청·장년을 동시에 연기하고(고곤의 선물), 러닝 타임 7시간짜리 연극에서 20분간 쉬지 않고 독백을 쏟아내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무대에서 웬만한 도전은 다 해본 그에게도 쉽지 않은 작품이다. 정동환은 “알료샤나 이반, 메피스토나 파우스트 모두 한 인간 안에 들어있는 존재이자 갈등”이라며 “배우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이들 캐릭터를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연출의 접근 방법이 연습을 거듭할수록 이해가 됐다”고 전했다.
정동환은 지난여름을 꼬박 이 작품 연습에 쏟아 부었다. 홀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캐릭터를 옮겨가는 찰나에도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다. 파우스트가 됐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연출은 야속하게(?) ‘메피스토가 묻어나온다’며 ‘확실히 다른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를 주문하기도 했다. 평소 ‘그 인물에 대하여가 아닌 그 인물로서 연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정동환은 “(이번 작품은) 다역(多役)을 주면서 이 덕목을 요구하는 작업”이라며 “얼마나 해결될지 알 수 없는, 리스크가 상당한 작품이지만 그러면 어떠냐”고 웃어 보였다. 애초부터 그에게 무대란 ‘내가 이번에 완벽하게 이뤄냈다’가 아닌 ‘누군가는 한 번 해볼 가치가 있다’는 데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정동환이 그동안 선보여온 무대는 도전, 고통이란 수식어가 붙는 소위 ‘센 작품’이 많았다. 작품 앞에 고뇌하는 그를 보며 가족들은 ‘이제는 안 그래도 되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정동환은 “나에겐 이것이 살아있는 것이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이 연극이냐’는 질문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평소 음미하는 연극의 의미를 읊조린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극한의 고통과 고뇌, 내적 갈등을 겪고, 마침내 존재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노정인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넘어선 우주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곧 우주와의 화해, 인간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 정동환은 “어떤 연극이든 이 근본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이 말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했다. 연극이라는 장르를 떠나 한 개인의 삶에서도 누군가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하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고통을 맛보며 깨달음의 노정을 이어가는 중이다. 고통의 작업마저도 “나를 믿고 맡겨주는 사람 없으면 경험할 수 없는 귀한 기회”라고 감사해 하는 천생 배우. 그의 다음 무대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