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을 몸으로 기억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최근 성내동 개인 연습실에서 만난 김설진은 이번 기획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사실 처음엔 “흥미롭지 않은 제안”이었다. 관악구의 ‘유명 자원’을 예술·교육적으로 풀어간다는 게 원래 기획안이었다. 자칫 계몽적인 콘텐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김설진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재단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역 공간을 풀어낸다’는 대전제만 남겨둔 채 논의해보자며 그와의 협업에 의욕을 보였다. 그 결과 프로젝트 주제는 ‘우리 삶을 보여줄 장소를 춤으로 풀어낸다’로 바뀌었다.
“지난 여름 태풍과 더위 속에서 비 맞아가며 장소를 탐방했어요. 다니다 보니 이 지역이 제가 그동안 생각한 한국과 많이 닮았더군요.” 대형 아파트 단지 옆에 폐타이어로 천막을 친 판자촌이 있고, 오래된 건물 앞 녹슨 자전거 옆엔 고급 수입차가 서 있었다. 한때 ‘고시촌’이라 불린 이 동네는 성공을 꿈꾸는 청춘들로 북적이던, 우리네 시대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묘한 조합들이 뒤엉켜 공존하는 풍경이 한달 여의 탐방 내내 그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게 점성촌, 옛 미용실과 카센터 건물, 재활용센터 등이 촬영 장소로 정해졌다. 모두 곧 사라져 잊힐 ‘재개발 지역’이다. 김설진은 “춤도 추는 순간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들 장소와 닮아있는 것 같았다”며 “재개발에 대한 찬반을 떠나 사라져가는 것들을 몸으로 기억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춤깨나 춘다는 댄서들도 직접 섭외했다. 기획 취지와 장소만 전달받고 참여한 댄서들은 개성 넘치는 움직임과 자신들의 해석을 담아 마치 한 편의 영상 화보를 보는 것 같은 감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시장통의 댄서 뒤로 지나가는 마을버스와 멀리서 담배를 태우며 촬영 현장을 구경하는 할머니들까지, 공간을 둘러싼 우리네 평범한 일상도 고스란히 영상에 담겼다. 영상을 관통하는 주제를 더 잘 살리기 위해 모든 영상에는 정종임 음악감독이 작업한 작품 한 곡만 썼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김설진 본인도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한국에 흥미로운 공간이 참 많은데 정작 그곳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촬영을 하면 주민조차 ‘여기서 왜 찍어요? 뭐 찍을 게 있다고’하는 반응을 보인 적이 많았거든요. 모두 본인이 갖지 못한 것을 쥐려 하면서 정작 본인이 가진 것은 가꾸지 않고 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인문학적으로도 많은 공부가 됐어요.”
김설진은 인터뷰 내내 이번 기획의 성과는 ‘호기심 자극’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근사하게 세팅된, 알고 있지만 안 가는 곳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이름 없는 일상의 공간을 담아 ‘그거 봤어? 거기 어딘 줄 알아?’하는 대화만 이끌어내도 충분해요. 이런 게 하나둘 확산돼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하면 되는 거죠. 이게 춤, 예술, 문화가 지닌 힘 아닐까요.” 서울시자치구문화재단연합회의 자치구 문화예술 콘텐츠 특성화 사업 일환으로 제작된 이번 영상은 23일 유튜브와 지역 내 각종 안내판 등에 공개된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