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25일 세상을 떠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뛰어난 인재에 대한 욕심이 그 누구보다 뚜렷했다. 고인이 대외적 활동을 멈춘 후에도 여전히 재계를 중심으로 그의 ‘천재 경영론’이 불확실한 미래를 뚫고 나갈 방법으로 회자될 정도였다. 삼성전자(005930) 등 그룹 주요 계열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 속에서도 ‘어닝 서프라이즈’를 이어갈 때마다 일찍이 인재경영을 설파했던 이 회장의 철학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뛰어난 인재에 대한 이 회장의 욕심은 2000년대 초반, 계열사 사장단이 경험한 한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고인은 사장단에 급작스럽게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후에 어떤 사업모델로 살아남을지를 준비해서 발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사장단은 부랴부랴 기존의 사업전략을 모으고 쥐어짠 내용으로 직접 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들의 발표를 모두 들은 이 회장은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여러분께서 5~10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며 웃으며 반문한 뒤 “그래서 (답은) 사람이다. 어떤 기술이 세상에 나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사람을 제대로 뽑아놓으면 미래를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틀에 박힌 사업전략 보고를 고민하고 회장을 만나러 갔던 사장단은 무척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이 회장은 시시각각 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대들보로서 인재에 방점을 찍어왔다.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부터 내려온 세 가지 경영철학인 사업보국과 인재제일·합리추구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서도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직접 곁에서 겪었던 삼성그룹의 고위임원들은 “S급 우수 인재에게는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줘라” “좋은 사람들을 뽑아서 끊임없이 교육하고 좋은 인재로 육성하자”는 인재제일에 관한 지시를 자주 접했다고 회상했다. 이 회장 스스로 면접에 참석해 인사담당자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생전 진행한 인터뷰 등에서도 이 회장은 “21세기는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전쟁의 시대”라며 한국 경제가 발전할수록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고 또 높이기 위해 인재를 계속해서 키워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왔다.
삼성의 인재제일 원칙은 지난 1957년 국내 최초의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시작으로 60년 넘게 이어지는 중이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시도한 ‘첫 공채’를 두고 혈연이나 지연·학연 등 사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채용이 진행되던 당시의 풍토를 완전히 깨고 공개채용을 통해 ‘흙 속의 진주’에게 일할 기회와 발전의 토대를 제공한 귀중한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최초의 시도는 이뿐이 아니다. 1993년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 신경영’을 발표하고 국내 최초로 대졸여성 공채를 도입해 총 139명을 식구로 맞이했다. 이듬해에는 ‘열린 인사개혁안’을 발표해 채용과정에서의 성차별 및 월급체계 차별을 없앴다. 1995년에는 3급 신입사원 채용 시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학력·성별 등 모든 차별을 배제한 ‘열린채용’을 시행해 국내 기업의 채용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채용과정에서 서류전형이 없어졌고 현재 삼성직무적성검사(GSAT)로 불리는 직무적성검사(SSAT)를 서류 통과 이후에 도입해 단편적인 지식과 학력 위주의 평가방식을 탈피하려는 시도도 이때부터 출발했다. 삼성은 주요 대기업들이 상시채용 등으로 채용방식을 바꾸고 코로나19 확산이라는 물리적 제한이 발생한 올해 상반기에도 국내 최초로 비대면 방식의 대규모 공채를 시도했다.
한편 이날 세상을 떠난 이 회장의 철학은 4차 산업혁명의 파도를 마주한 삼성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I), 나노기술, 빅데이터 등 최첨단 융복합 기술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초일류 기업을 향한 삼성의 노력은 인재채용에서부터 출발했다”며 “내수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을 반도체와 스마트폰, 가전 제조로 바꾸는 과정 역시 이 회장의 남다른 인재욕심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