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약사 삼촌’이라고도 불렸던, 친근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위해 만든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던 카페시우스. 분명 약사였음에도 그는 수감자들에게 필요한 치료약을 의도적으로 내주지 않았고, 가스실에 쓰이는 치명적 화학물질인 ‘치클론B’를 성실히 관리 감독했으며 임산부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시신에서 금니를 채취해 빼돌리기까지 했으니 양심이나 죄의식은 없었다. 악(惡)에 대해 스스럼없었던 그는 승승장구해 평범한 약사에서 유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나치 장교에까지 올랐다.
저자는 나치 수용소에서 대량 생체실험을 벌인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자서전을 준비하던 중 아우슈비츠의 주임 약사였던 카페시우스를 ‘발굴’해냈다. 그의 행적을 추적해 지난 2017년 출간된 책은 중국, 스페인 등 15개국에서 번역 출간돼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고 이번에 국내에 상륙했다.
여느 나치 수용소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책 속 이야기는 참혹하다.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일할 때 만해도 ‘사람 좋은 영업 사원’이던 카페시우스는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면서 점점 사악해진다. 평범한 사람에게 그토록 악한 면이 숨어있었던가 놀라게 만드는 그는,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을 몸소 생생하게 실천해 보인다.
책은 가해자 카페시우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거대 화학회사 이게파르벤이 나치와 손잡고 어떻게 이익을 챙기는지도 파헤친다. 죽음의 수용소는 단지 광기어린 히틀러 한 사람과 그를 따르는 광신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복합기업 이게파르벤의 이해관계가 나치와 얽혀 인간성이 말살된 수용소가 생겨났고, 그 안에서 카페시우스 같은 개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타락했고 죄를 저질렀다. 책은 이게파르벤이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제약회사 바이엘의 전신임을 밝혀내며 독자를 놀라게 한다.
주인공 카페시우스를 비롯한 전범자들은 자신의 죄가 잊히기만을 바랄 것이다. 그들을 향해 저자는 “심각한 문제는 아우슈비츠를 70년 전에 일어난, 오늘날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과거의 일로 치부해 버리는 역사관”이라고 꼬집는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친일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우리에게도 남 얘기가 아니다.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