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赦免)을 새해 벽두부터 주장하면서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당내에서 곧바로 반발이 나왔지만, 이 대표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밝히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할 태세다. 이 대표가 사면 카드를 통해 ‘통합·협치’의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탄핵에 대한 입장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야권의 분열을 동시에 노린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사면론으로 차기 대권 주자 1위로 올라선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통성’을 정조준하며 대권을 향한 강한 권력의지를 보였다는 관측도 있다.
이낙연 “사면 입장 변화 無, 文에 직접 건의”
이 대표는 1일 신년 인터뷰를 통해 “적절한 시기에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혀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켰다. 당내에서조차 “당사자들의 반성이 우선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반발이 거셌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지난 3일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첨예해진) 이런 갈등을 두고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본다”며 “통합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며 거듭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주장했다. 이 대표가 연초부터 사면을 들고 나와 ‘통합과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파장 1. 李·朴 사면 땐 野 분열 불가피
그런데 야권은 이 대표가 연초부터 내민 손을 덥석 잡지 못하고 있다. 진정성이 있는 제안인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신중한 언행으로 정평이 난 이 대표가 사면을 ‘개인의 신념’ 정도로 정리하면서 의심은 더 커졌다. 이미 형이 선고(이명박)되거나 대법원 최종 판결을 앞둔(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사면법상 특별사면 대상이다. 특별사면은 사면법 제9조에 따라 ‘대통령이 한다’고 규정돼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사면과 관련해 “청와대와 교감은 없었다”고 밝혔다.
야권은 사면권자인 문재인 대통령과 논의하지 않고 나온 사면에 대해 ‘정치적 노림수’를 의심하는 상황이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난 5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를 추도하며 “대통령마다 예외 없이 불행해지는 ‘대통령의 비극’이 이제는 끝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면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사면을 말하자 “사면을 두고 장난치면 안 된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역시 “대통령이 직접 본인의 생각을 국민에게 밝히는 것이 정도”라며 “국민 통합이 목적이라면 단순한 사면을 넘어서 진심이 전해지도록 제대로 (사면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이 대표가 ‘(先)반성·(後)사면’을 내걸자 야권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대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대리사과가 아닌 두 전직 대통령의 직접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이 전 대표의 측근인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이에 대해 “시중 잡범들에게나 하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친박계 박대출 의원도 “비겁하고 잔인한 처사”라며 “엉뚱하게 ‘반성’ 조건을 내걸며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두 분에게 공을 떠넘긴다”고 주장했다.
파장 2. 적폐수사 尹, 대상 朴 한 진영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이 대표가 내건 사면론이 대선주자 1위인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압도적인 대선주자 1위였던 이 대표의 입지는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지난 3일 내놓은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이 대표는 15%를 기록해 1위인 윤 총장(30.4%)과 차이가 두 배로 벌어졌다. 2위인 이재명 경기도지사(20.3%)와도 5%포인트 이상 차이를 보였다. ‘대권 대망론’이 균열을 보이자 이 대표가 사면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면이 단행되면 범야권 단일화를 통해 정권 되찾기로 판을 짜는 중도·보수진영의 입장은 복잡해진다. 두 전직 대통령은 이른바 ‘적폐수사’를 주도한 윤 총장 사단이 직접 기소해 형을 받았다. 문 대통령이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면 수사를 한 윤 총장과 ‘적폐의 몸통’인 두 전직 대통령이 한 배에 타는 셈이 된다. 야권에서는 이재오 고문의 말처럼 두 전직 대통령의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야권은 사면이 단행되면 노선 정리를 해야 한다. 현재의 대권 구도만 볼 때 야권은 대선주자 지지율 1위인 윤 총장을 단일 후보로 내세워야 그나마 정권을 되찾을 가능성이 생긴다. 보수진영이 세운 대통령을 끌어내린 윤 총장을 보수진영이 차기 대선주자로 내세워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는 것이다. 이 일은 정치보복의 선봉에 선 윤 총장과 보복을 당한 박 전 대통령의 화해가 없이는 어렵다.
여기에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강성보수층이 다시 집결하면 중도 행보를 걷고 있는 국민의힘이 분열할 수도 있다. 야권이 사면에 대해 신중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크게 호응할수록 이 대표의 ‘사면 정치’가 힘을 받을 수 있어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 대표는) 사면 카드로 통합과 협치을 내세우고 야권 분열과 윤석열 총장 저격 등 세 가지 이상을 가져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