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사망 직후 개정 ‘아동학대 메뉴얼’ 시행
정인이 사건서 지켜지지 않은 내용 다수 포함
앞으로 신고자가 의사면 반드시 대면조사해야
정인이 사건은 다른 의사 찾아가 '구내염 소견'
대면조사는커녕 전화도 않은 채 마무리한 경찰
영유아 상흔 발견시 X-ray 통해 원인 확인해야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갖다 놓은 사진과 꽃 등이 놓여 있다./연합뉴스 정인이가 세 번의 학대 신고에도 부모 곁을 벗어나지 못한 데는 부실한 ‘아동학대 대응 메뉴얼(메뉴얼)’이 한몫 했다. 정부는 지난해 하순 메뉴얼 일부를 뜯어고쳤는데 하필 정인이에 대한 마지막 신고가 이뤄지고 일주일 뒤 시행됐다. 추가된 내용에는 ‘영아에게 상흔이 보이면 필히 골절상 여부를 살펴야 한다’거나 ‘신고자가 의료인인 경우 반드시 해당 의료인을 대면 조사해야 한다’는 등 정인이 사건에서 건너뛴 원칙들에 대한 보완 내용이 담겨 한발 앞서 시행됐더라면 정인이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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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한 의사 제끼고 애먼 데서 “구내염 소견”…새 메뉴얼선 안통한다
12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정인이가 사망에 이르기 약 2주 전인 지난해 10월 1일부터 아동학대 조사의 전문성을 높이겠다며 세번에 걸쳐 수정한 메뉴얼을 시행했다. 메뉴얼은 아동학대 전담공무원 등이 참조하는 것으로 ‘아동학대처벌법에 따른 세부 업무수행절차’, ‘아동학대 대응 업무 단계별 업무수행 절차’ 등 아동 학대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법을 담고 있다.
추가된 규정 중에는 ‘의료인이 신고한 경우 관련 의료인(아동 담당 주치의, 신고자 등)을 반드시 대면 조사해야 한다’는 규정이 눈에 띈다. 지난해 9월 23일 정인이를 진료했던 한 A 소아과 원장은 학대가 의심된다며 신고했지만, 당시 경찰은 신고한 병원을 방문해 대면하기는커녕 전화 조차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후 정인이가 사망하고 나서야 진상 조사를 위해 해당 병원을 방문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 역시 A 소아과가 아닌 양모가 자주 다녔다는 병원에서 단순 구내염 소견을 받아들었다. 이후 다른 소아과를 방문했지만 거기서도 학대 소견을 받지 못한 채 사건은 종결했다. 만약 이 규정대로 신고한 의사를 대면 조사했더라면 정인이가 학대의 굴레에서 뒤늦게나마 벗을 수 있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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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 상흔 발견시 →X-ray로 골정상 확인해야
정인이와 같이 의사소통이 어려운 영·유아나 장애 아동에게 상흔이 발견되는 경우 반드시 병원진료 시 X-ray 촬영 등을 통해 과거 골절 흔적, 내상 여부 등을 면밀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조항도 추가됐다. 이 조항 역시 앞서 도입됐다면 정인이의 학대를 멈출 수 있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경찰과 아보전은 여러 차례 학대 조사를 하는 동안 정인이의 쇄골에서 실금을 발견하거나 멍을 확인했지만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지난 10월 13일 사망 당일 정인이를 응급조치한 소아과 전문의는 정인이 X-ray 촬영 사진에서 발견된 오래된 골절 흔적들을 가리켜 양부모의 학대가 상습적이었다고 설명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전문의는 지난 앞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갈비뼈 X-ray 촬영 사진을 가리켜 “화살표 찍은 부위들이 전부 다 골절이다. 중간중간 새로운 뼈가 자란다든지 붙은 자국이 있다”며 “이 정도면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아동학대 소견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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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고위험 아니다” 평가한 기준은 방치
개정에도 불구하고 한계점도 여전하다. 앞서 논란이 된 ‘아동학대 위험도 평가 척도’가 대표적이다. 메뉴얼에 포함된 이 척도는 신고를 받고 조사자가 현장에서 학대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 척도에서 4점 이상이 나오면 조사자에게 분리 조치가 권장되는데 정인이는 세번의 조사에서 3·2·3점에 그쳤다. 아동 스스로 분리보호나 거부감을 표현하는지를 판단하는 척도에 ‘아니다’고 판단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한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알아서 어른들에게 분리 의사를 표현하겠느냐”며 “아동 발달 단계조차 고려하지 않은 현실성 없는 척도”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