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뒤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지금의 2배인 6만 달러를 넘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대학이나 기업·정부뿐 아니라 학생과 직장인까지 모두 기존 판을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합니다.”
권오경(65·사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18일 서울 강남의 한국기술센터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 초반(2020년 3만 1,000달러가량)에 정체돼 있는데 오는 2030년을 목표로 주요5개국(G5) 진입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며 이같이 역설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의 석학으로 한양대 석좌교수인 권 회장은 최근 임기 2년의 차기 회장에 재선임됐다. 그는 “우리가 미국보다 더 투자를 받기 쉬운 환경인데도 젊은이들이 창업에 적극 도전하지 않고 꿈이 너무 작은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는다”며 “교수나 학생이나 ‘내가 퍼스트 무버가 돼 20~30년 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회사를 창업하겠다’고 결심한 뒤 실제 목표의 절반만 달성해도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도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퍼스트 무버를 넘어 게임 체인저 마인드로 전환해야 하고, 정부는 조직이기주의라는 칸막이 행정에서 벗어나 미래를 융합해 설계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국민소득을 2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기존 산업의 구조 조정과 신산업 육성이 필요할 것 같은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배터리 등은 초격차를 유지하고 신산업을 키우기 위한 규제 개혁과 생태계 구축에 힘을 쏟아야 한다. 디지털 전환, 서비스·플랫폼 산업 육성, 바이오·생명과학 집중 투자를 통해 미국과 중국을 앞서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산업구조 전환 속도를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가령 애플이 2년마다 신모델 하나를 내놓는다면 삼성전자는 2년에 모델을 4개 내놓는 방식이다. 4차 산업혁명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은 위기이지만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산업구조 전환을 위해 정부에 주문할 게 있다면.
△산업구조 전환을 제약하거나 방해하는 덫이 너무 많다. 탈규제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산업을 키우려면 미국이나 중국처럼 처음에는 다 풀어주고 나중에 문제가 될 때 룰을 정하는 식이 돼야 한다. 규제 샌드박스 정도로는 안 된다. 기업들이 속도 경쟁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인센티브 부여와 적정한 압력도 필요하다. 정부 부처 간 장벽이 너무 높은데 부처끼리 융합 기술 프로젝트를 만들 경우 예산 지원이 잘 이뤄져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등의 공동 프로그램 추진과 범정부 조정 능력 강화, 혁신 중심 재편 등이 절실하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산업 혁신의 큰 줄기가 이어지도록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에 게임 체인저가 되려면 산업계의 혁신도 요구되는데.
△지난해 각국별 유니콘(기업 가치 1조 원 이상) 기업을 보면 미국은 242개로 1위이고 중국이 199개로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다음은 영국(24개), 인도(24개)에 이어 한국이 11개이고 이스라엘·브라질(각 6개), 일본(4개) 순이다. 우리가 플랫폼과 기술 기반 기업을 키워 유니콘을 30개 정도는 만들고 기업 가치 10조 원 이상의 데카콘도 많이 배출해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려면 창업밖에 없다. 외환 위기 때 인터넷 붐을 타고 창업해 대성공을 거둔 50대 초반의 벤처 1.5세대들이 롤 모델이 될 수 있도록 많이 통 크게 나서줬으면 한다. 이들이 과거 정부나 대기업에 뼈아픈 게 있어 몸을 사리는 면도 있겠지만 적극적 역할을 했으면 한다. 기업들은 혁신할 수밖에 없지만 아직도 패스트 팔로어 시절 의식에 머문 경우가 많다. 빨리 변해야 한다.
-대학의 변화도 중요한데.
△대학은 미국처럼 교수와 기업의 겸직 활동을 확대해야 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의 경우 교수 셋 중 한 사람 이상은 기업에서도 같이 봉급을 받는다. 주 3일은 대학, 나머지는 기업에서 근무하며 시너지를 낸다. 대신 대학의 봉급은 절반만 받는다. 우리 대학은 프로젝트 협의 명목으로 비공식적으로 매주 하루 기업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겸직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교육부가 대학의 기술 사업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 대학에서 건물을 활용할 때 규제가 많아 기업연구소 유치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데 좀 풀어줘야 한다. 아울러 저출산 시대에 문을 닫아야 하는 대학의 퇴로도 열어줘 벤처기업 등이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의 혁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 연구개발(R&D) 체계의 효율성과 자율성 부족이 지적되고 있는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에서 한국은 선진국이다. 대부분의 정부 R&D 과제 수행이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실효성 있는 시장 창출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 과제 수행 중 중간 결과물과 최종 결과물의 목표치를 계속 높여야 경쟁력 있는 기술이 나올 수 있다. 국가 R&D 관리가 중복 투자 해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역설적으로 경쟁 회피로 이어지고 부처 간 칸막이 속에서 안일한 R&D가 중복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국가 R&D 관리 체계를 미션 중심, 성과 지향으로 재편해야 한다.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 기업에 지원하는 정부 R&D 자금이 올해 27조 원을 넘는다. R&D 자금 기획·집행·평가 과정에서 성과 위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공학한림원이 2030년 ‘G5 메가 프로젝트’를 강조하는데 그 비전과 전략은 무엇인가.
△G5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범부처 차원의 대규모 R&D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수요 주도형으로 설계해 세계적으로 앞선 기술 개발과 시장 창출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플라잉카·로보택시·드론 등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상용화를 목표로 제시한다면 개별 기술에 대해 R&D를 하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고 제조업과 소프트웨어, 수요와 공급, 다양한 산업과 기업, 기술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초연결·초융합을 시도할 때 가능하다.
-정부가 1997년 추진했던 주요7개국(G7) 프로젝트와 비교하면 G5 메가 프로젝트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과거 G7 프로젝트의 목표는 과학기술 선진 7개국 진입이었는데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G5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중국·독일·인도·일본으로 구성된 G5에 우리가 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디지털 전환형, 수요 지향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학한림원은 2019년에는 핵심 원천 기술 고도화, 대립적 노사 관계 해소, 고급 인력 확충, 신산업 규제 철폐를 강조했다. 이어 지난해에는 정부 R&D 관리 체계의 벤처캐피털 모델 전환, G5 메가 프로젝트를 위한 초격차 전략, 신산업 규제 철폐와 기존 산업 퇴출 장벽 해소, 지역 산업 구조 전환과 혁신 클러스터화, 산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촉진 특별법 제정 등을 제시했다.
작년 말 세계공학한림원평의회(CAETS)에서 정세균(앞줄 가운데) 국무총리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관영 고려대 교수, 이건우 서울대 교수, 정은승 삼성전자 사장, 한상범 LG디스플레이 고문,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 정승일 산업부 차관, 정 총리, 권오경 공학한림원 회장, 박동건 삼성디스플레이 고문, 이용훈 UNIST 총장, 김영재 대덕 대표, 노종선 서울대 교수, (뒷줄 왼쪽부터) 이인규 고려대 교수,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대표, 이상엽 KAIST 교수, 김우승 한양대 총장, 차국헌 서울대 공대학장, 이준혁 동진쎄미켐 대표, 안현실 한경 논설위원, 남순성 이제이텍 대표.
-내년 5월 출범하는 차기 정권에 미리 제안할 것이 있다면.
△올해 6~7월 정책을 제안할 텐데 구조 개편이 필요한 산업을 정리·포기하거나 인수합병(M&A)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장 포화와 정체에 따른 구조 개편 산업군을 신기술→신성장→지속 성장 산업군으로 빠른 속도로 변환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올 하반기에 과학기술과 산업 정책을 담은 정책 총서를 제공하고 토론회도 개최하려고 한다. 여야 주요 대선 후보 초청이 여의치 않으면 여야 정책위의장을 초청할 것이다. 산업 미래 전략을 비롯해 R&D, 특허 등 지식재산, 인재 양성과 공학 교육, 정부 거버넌스 혁신 등의 대안을 담을 것이다.
-인재 양성 측면에서 교육 혁신이 매우 중요한데.
△공학 교육에서도 원격·가상 실험 수업 가능성이 엿보인다. 핵심은 커리큘럼을 혁신해 과학기술과 공학·인문학을 연결하는 지식을 갖춘 융합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대학은 논문 위주에서 벗어나 창업과 학제 간 융합 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 프로젝트 중심 교육까지 어우러지고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까지 다룰 수 있게 해야 한다. 우수 인력이 필요한 중견·중소기업과 정부가 공동으로 국가장학재단 기금을 조성해 취약 계층 대학생을 지원하고 이 인재들을 유치하는 것도 필요하다.
작년 초 정세균(앞줄 가운데) 국무총리 등이 공학한림원 신년 하례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권오준 POSCO 전 회장, 이기준 서울대 전 총장,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 정 총리, 권오경 공학한림원 회장,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 정준양 POSCO 전 회장. (뒷줄 왼쪽부터) 차국헌 서울대 공대학장, 허정석 일진홀딩스 대표, 박동건 삼성디스플레이 고문, 이건우 서울대 교수, 김영재 대덕 대표, 이용훈 UNIST 총장, 김영달 아이디스홀딩스 사장, 권성훈 서울대 교수.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G5 진입을 위해서는 꿈이 있는 젊은이를 키워야 한다. 앞으로 120~130세까지 평균수명이 늘어날 텐데 110세까지 일한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야 한다. 기업에 들어가 AI·빅데이터·정보통신기술 경험을 쌓은 뒤 벤처를 창업해도 된다. 아예 세계시장을 겨냥해 미국에서 창업하고 모국과 함께 상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한국 사람들도 적잖은데 기술에만 몰입해 세계시장을 보는 눈이 부족하더라. 사회와 경제·마케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봐야 한다.
-20일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 ‘그린 뉴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는데.
△우리의 뉴딜 정책이 주로 정부 재원 위주로 돼 있는데 민간 투자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규제·제도 혁신, 인센티브 부여가 필요하다. 산업구조 전환과 탄소 저감에 따른 제조업의 부담 측면도 좀 봐야 할 것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he is..
195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책임연구원을 지낸 뒤 한양대 공대 교수로 부임해 산학 협력 R&D에 집중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 한양대 공대 학장, 교학부총장 등을 거쳐 현재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2017년 1월부터 학·연·산 리더급 회원 1,200여 명으로 구성된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으로서 산업구조 전환과 신산업 육성을 위해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해 30개국 공학한림원 회원들이 참여하는 ‘세계공학한림원평의회(CAETS)’ 회장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