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 임기를 시작한 21대 국회에서 올해 1월 말까지 발의된 의원 법안은 7,182건에 달한다. 20대 국회에서 같은 기간에 발의된 법안(4,755건)의 1.5배 규모다. 이 같은 속도가 이어지면 역대 최다 법안을 발의했던 20대 국회(2만 4,000여 건) 수준을 넘어 임기 말에는 4만 건에 이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처럼 법안 발의가 양적으로 폭증하면서 실제 주요 법안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중한 검토 및 심사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이에 따라 무분별한 법안 발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법안 발의 전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입법영향평가’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의회정치를 하는 국가 가운데 입법영향평가가 없는 유일한 국가다.
3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 들어 1월 한 달 동안의 의원 발의 법안은 656건으로 역대 최다 발의 기록을 세웠다.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선심성 법안을 중심으로 하루 평균 23건의 법안을 쏟아진 데 따른 결과다. 같은 기간 정부 입법안은 12건에 불과했다.
정치 평론가와 학자들은 국회의 무분별한 법안 발의가 국회의원의 정치적 선명성 확보와 지역구 관리를 위한 것인만큼 입법영향평가 제도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범수 연세대 디지털사회과학센터 연구교수는 입법영향평가의 지표로 ‘발의안과 가결안의 일치성’을 제안했다. 법안 성안부터 영향평가를 통해 완성도를 높이자는 취지다. 아울러 전문가 집단 평가를 동시에 진행해 경제·사회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문화 전환도 요구된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국회의 과도한 권력 경쟁이 정작 입법부의 역할인 법안 발의의 질적 향상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하고 있다”며 “국회에서 입법·정책 경쟁이 우선 자리를 잡아야 입법영향평가에 대한 의원들의 관심도 높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포퓰리즘 늪에 빠진 국회=국회의 ‘묻지 마’식 법안 발의에 따른 과잉 입법이 사회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선심성 법안과 규제 법안이 혜택과 규제를 받는 국민 간 ‘편 가르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의원입법의 사전·사후영향평가가 없어 의원 자신이 발의한 법안이 선심성인지 규제 법안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일하는 국회’의 질적 전환을 위해 입법영향평가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공동 발의조차 인식 못 한 채 표결=3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공동 발의 의원 가운데 해당 법에 반대나 기권 표결을 한 의원은 총 19명에 달했다. 이들은 법안 발의자에 이름을 올려놓고도 정작 본회의 표결에서는 찬성 투표를 하지 않았다.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법안 공동 발의자인 것을 착각한 경우도 상당했다.
규제 법안도 마찬가지로 법안 자체에 영향평가가 없다 보니 발의자인 의원이 규제 입법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4·7 보궐선거를 앞두고 쏟아내는 선심성 포퓰리즘 법안도 급증 추세다. 입법 비수기인 1월 656건이 의원 발의됐다. 이는 지난 2018년 지방선거 직전 1월 입법안인 524건을 가볍게 넘겼을 뿐 아니라 최근 10년간 1월 한 달 동안 법안 발의 평균(247건)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특히 656건의 법안 가운데 감염병 예방 관련 법률만 20건, 재난 관련 의료비 지원과 안전 관리 5건, 소상공인지원법률 8건 등 이른바 ‘퍼주기 법안’으로 분류되는 법안이 속출했다. 해당 기간 세금 감면의 특례법은 44건에 달했다.
◇법안 질적 향상 유도 시스템 개선=결국 과잉 입법에 매몰된 국회의 발의 행태를 질적 향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해 국회사무처가 정책 연구 용역으로 추진한 ‘국회 의원입법 동향 및 의원입법의 질적 향상 방안 연구’ 내용을 보면 입법영향평가를 위해 법안 발의 전 파급 효과와 재원 조달 등을 파악하기 위한 지원 시스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법안 발의 때부터 기존 제도와의 차이, 대상 범위 등 제도 변화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평가하기 위해 입법 지원 기관의 인력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한국의 입법 환경 개선을 위해 입법 영향의 분석 시행을 권고하고 있다. OECD 규제개혁보고서에는 모든 규제 절차는 입법 방식과 상관없이 동일한 수준의 엄격함을 유지하도록 입법 과정의 품질 관리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아울러 한국 정부의 입법은 엄격한 평가를 거치고 있지만 의원입법은 영향평가가 부족해 의원입법에도 입법영향평가 시행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상공회의소도 국회에 입법영향평가 제도화를 요청했다. 입법영향평가 도입에 따라 국회의 심사 부담을 줄이면서 ‘황당 법안’ 발의를 억제할 뿐 아니라 법안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게 대한상의의 주장이다.
◇정부 발의보다 허들 낮은 의원 발의=OECD까지 나서서 한국 의회 입법 개선을 주문한 것은 정부 제출 법안에 비해 의원 발의 과정이 지나치게 간소한 까닭도 있다. 정부 입법은 현재 사전영향평가를 받지만 의원입법은 사전 평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부 입법은 부패영향평가, 관계 기관 협의, 당정 협의, 규제 심사, 법제처 심사, 차관회의 및 국무회의 심의 등의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반면 의원입법안은 의원 10인 이상의 동의와 비용추계서 첨부 요건만 충족하면 발의가 가능하다. 하룻밤 사이에 법안을 만들어 보좌관이 다음날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10명의 의원 서명을 받아내면 법안 실적이 1건 기록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차이가 내실 있는 의원 발의 자체를 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입법영향평가 ‘입법권 침해’ 인식부터 전환돼야=결국 국회의 입법 물량 공세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 입법영향평가 도입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프랑스 등 다수의 국가들은 2000년대부터 영향평가를 도입해 법안을 발의하기 전 법률 제·개정의 잠재적 영향을 미리 분석하고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사전·사후 분석 결과를 법률안과 함께 제출해야 한다. 입법영향평가 제도 자체도 평가 시기에 따라 세분화돼 있다. 독일은 사전입법평가·병행입법평가·사후입법평가 등 3단계로, 스위스 등은 사전·사후 평가 2단계로 나눠 실시한다. 프랑스도 2008년 개정 헌법을 통해 입법영향평가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 역시 의원입법영향평가가 없지만 일본은 정부 입법이 의원입법에 비해 3배가량 많은 데다 의원입법조차 각 정부 부처와 공동으로 원안을 작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의회정치가 발달한 국가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게 입법영향평가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제도 도입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실제 이를 추동하려는 움직임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입법권을 침해한다기보다 입법영향평가가 입법의 지원 역할을 한다는 인식 전환이 우선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가결률 신경쓰다 부실입법 양산"=“법안 가결률이 낮을수록 선진국형 국회다.” 입법 성과를 나타내는 지표인 가결률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치 평론가들은 법안 가결률이 낮을 경우 부실 국회라고 평가해온 가운데 가결률만 높이려 할 경우 오히려 부실 법안이 속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입법영향평가 결과 부실 입법으로 판단될 경우 상임위 차원에서 법안을 폐기시키고 있다. 그 결과 법안 가결률은 10%에도 못 미친다. 법안 가결률에 연연하기보다 법안의 완성도를 높여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3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8대 국회 때 17%였던 가결률은 19대 국회 16%, 20대 국회 11%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처럼 법안 가결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가결률을 높이는 것이 목표가 될 경우 오히려 부실 법안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시 말해 입법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美 의회 수준이하 '법안'은 폐기처리=실제 서구 선진국 역시 법안 가결률은 높지 않다.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이 입법조사처로부터 회신받은 ‘주요국 의회 법안 가결률’에 따르면 미국은 가결률이 3.0%이고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5.2%, 6.0%에 불과하다. 입법조사처는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입법 수요 증가와 함께 법안 제출 건수가 늘어나 가결률 자체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며 “가결률을 입법 성과의 척도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즉 ‘무더기 법안 계류→무더기 임기 만료 자동 폐기’ 등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가결률 제고에 신경 쓰기보다는 수준 이하의 법안이 아예 상임위에 상정되지 않도록 하는 제어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선진국 의회도 입법 과정 자체가 ‘엄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법안이 제정될 경우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부정적이면 아예 폐기시켜버린다. 미국 의회는 상임위 차원에서 법안 80%를 자체적으로 걸러내 폐기해버리고 나머지 20%만 집중 심사해 법안의 수준을 높이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관계자는 “입법영향평가는 법안을 사전에 분석해 그 결과를 법안에 반영하도록 하는 제도”라며 “법 조문 등 형식적 측면에 대한 검토보다는 입법 목적에 법안이 부합하는지, 예상되는 부작용은 없는지 등 내용을 검증하기 때문에 가결률은 하락하더라도 완성도 높은 법안이 통과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종호 기자 joist1894@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