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스마트폰으로 만든 유령패션…인간 욕망의 허깨비 그렸죠"

◆중견작가 안창홍 디지털펜화 첫 개인전

"여든작가도 하는데…디지털 도전

옷들만 남겨 현대인 내면 표현"

호리아트스페이스 내달 13일까지

안창홍의 디지털펜화 '유령패션' 연작 전시 전경.안창홍의 디지털펜화 '유령패션' 연작 전시 전경.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데이비드 호크니(84)도 일찌감치 아이폰과 아이패드 드로잉을 시작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나 싶었죠. PC 수준의 스마트폰을 좀 더 생산적으로, 나에게 더 적합하게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다 지난해 6~7월부터 걸으면서도 그릴 수 있는 스마트폰 디지털펜화를 시작했습니다.”



라밴더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을 풀처럼 흔들며 중견 화가 안창홍(69)이 신작의 제작배경을 이야기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15일 개막해 다음달 13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유령패션’의 기자간담회에서다. 작가는 대규모 개인전을 두 차례나 치른 후 만신창이가 된 몸, 나른해진 의식을 부축하기 위해 경기도 양평군의 작업실 주변을 몇 시간씩 걸으며 자신의 신체성을 들여다보던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방법론을 택한 셈이었다. 그는 스마트폰(갤럭시노트20)으로 300여 점을 작업했고 그 중 50점을 엄선해 선보였다.

디지털펜화로 완성한 신작 '유령패션'을 소개하고 있는 안창홍 작가.디지털펜화로 완성한 신작 '유령패션'을 소개하고 있는 안창홍 작가.


안창홍의 '유령패션' 연작.안창홍의 '유령패션' 연작.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블라우스 위로 찐득한 물감이 뚝뚝 흘러내린다.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고급스러운 수트의 화려한 문양은 나비처럼 날아 오르고 낙엽처럼 떨어져 뒹군다. 모양새만 봐도 딱 알아볼 법한 해외 명품 브랜드 의류, 조선 왕실의 화려한 한복들도 비워진 채 남았다. 옷의 주인은 어디로 갔는가. 마치 유령이 되어버린 양 옷만 둥둥 떠 있다.

새로운 시도의 신작이건만 ‘안창홍 냄새’가 폴폴 풍긴다.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가듯, 얼굴 없이 옷만 남은 인체는 그의 대표작 ‘인간 이후’(1979)에 등장한 바 있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도 활동했던 안 작가는 오래돼 누렇게 바랜 가족사진에서 눈동자를 파내고 입을 검게 비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족사진’ 연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가공하고 재해석 하는 일은 안창홍의 특기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는 물감은 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의 몸부림처럼 핏물인 듯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근대사의 비극을 개인의 고통으로 드러내던 작가는 암투병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천박할 정도로 노골적인 누드 연작인 ‘배드 카우치’를 선보였다. 익명의 벗은 몸을 통해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면을 끄집어내던 작가가 이번에는 사람을 지우고 옷만 남겼다.

안창홍의 디지털펜화 '유령패션' /사진제공=호리아트스페이스안창홍의 디지털펜화 '유령패션' /사진제공=호리아트스페이스



그는 인터넷을 뒤져 최첨단의 감각으로 찍어낸 사진을 찾았다. 패션 화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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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자, 자본주의와 부와 계급의 상징이기도 하죠. 풍족함과 물질주의의 정점인 패션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공허함을 봤습니다. 인간의 유대관계가 단절된 도시사회에서 화려하게 물결치는 거리의 의상들을 보면서 나는 허깨비같은 환상을 봅니다. 몸의 물질이 다 빠져나가고 옷만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 듯한 느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봐야 할 지점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이번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아이프(aif)의 김윤섭 대표는 “안창홍의 이번 디지털펜화 ‘유령패션’은 ‘비움의 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워짐의 허망함’을 고발한 것”이라며 “그림 속 투명모델이 아무리 멋스럽게 포즈를 취한들 정작 주인공은 보이질 않으니 허탈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40년 이상 불편함을 추구하는 문제적 작가로 화단을 누빈 안창홍답게 이번 작품도 논쟁거리를 던진다. 스마트폰의 도구적 기능만 빌려왔을 뿐 본질적 핵심인 온·오프라인의 연동이나 네트워크 확장, 커뮤니케이션 기능 등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아 보인다. 패션화보나 패션쇼를 촬영한 사진작가에 대한 저작권 침해 문제도 지적될 수 있다.

“호크니는 자신이 늘 해오던 방식의 작업을 디지털로 옮겨 그린 것이지만, 나는 또 다른 조형언어로 문명비판을 실천한 것이라 근본적 뿌리가 다릅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화가로서 물감으로 이뤄내는 것’이기에 궁극에는 디지털 펜화를 유화로 옮겨낼 것입니다. 저작권의 경우 사진을 차용했으나 본래 의상과 컨셉트가 갖고 있는 것과 상반된, 새로운 조형어법을 찾아내려 진지하게 접근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시는 영상이미지 원본을 디지털 액자에 담아 5초 간격으로 이미지를 바꿔가며 보여준다. 작품 구매자가 수백 점의 작품 중 10점, 20점씩 선택해 액자에 담을 수 있고, 작가는 디지털 액자 뒷면에 사인과 함께 별도 드로잉을 그려준다. 판화를 10장씩 묶은 엽서작품의 판매수익금은 아프리카 말라위 어린이 미술재료 지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안창홍 작가는 '유령패션' 작품을 담은 디지털액자 뒷면에 사인과 함께 별도 드로잉을 그려 제공한다. /사진제공=호리아트스페이스안창홍 작가는 '유령패션' 작품을 담은 디지털액자 뒷면에 사인과 함께 별도 드로잉을 그려 제공한다. /사진제공=호리아트스페이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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