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지나간 듯하지만 꽃 피는 봄이 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아니더라도 계절적으로 애매한, 여행을 계획하기 어려운 요즘, 자연과 가까우면서도 인적이 드문, 그러면서도 계절적 요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곳을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곳이 있다. 전북 부안군이다.
부안은 영화 '변산' 때문인지 변산(邊山)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고장이다. 변산은 원래 삼국사기 때부터 써오던 산의 이름이다. 호남정맥에서 뚝 떨어져 별도의 산군(山群)을 이루고 있는데 최고봉이 불과 해발 508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산세가 수려해 예로부터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혀왔다. 코로나19로 발길이 뜸해진 틈을 타 기암괴석과 수려한 폭포, 서해 최고의 낙조 등을 품은 변산을 찾았다.
예로부터 변산은 능가산 혹은 영주산·봉래산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한자로 절 '가'자를 쓴 능가산(楞伽山)은 천년고찰 내소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관음봉(해발 424m)의 또 다른 이름이다. '능가'는 불교 경전인 능가경(楞伽經)에서 따온 말로 부처가 스리랑카 능가산에서 설법한 가르침을 모은 책이다. 내소사 일주문에 변산이 아닌 '능가산 내소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이유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변산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소사에서 직소폭포까지 이어지는 편도 4.2㎞(2시간) 거리의 트레킹 구간이다.
내소사까지는 부안IC를 빠져나와 30번 국도를 타고 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부안 명소 대부분이 해안 도로인 30번 국도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는 줄포IC가 내소사와 훨씬 더 가깝지만 알파벳 소문자 'a'자를 닮은 해안 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가면 군산과 연결되는 새만금 1호 방조제부터 변산해수욕장·고사포해수욕장·적벽강·채석강·모항까지 변산의 명소를 모두 다 둘러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변산반도를 차로 둘러보는 비대면 여행법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코스로도 제격이다.
'a'자의 첫 획이 시작되는 오른쪽 윗부분에서 출발했다면 3분의 2가량 지났을 때쯤 내소사탐방지원센터와 연결된다. 내소사는 주차장부터 대웅전 앞까지 평지로만 연결돼 있다.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일주문을 통과하면 600m 길이의 전나무숲길이 펼쳐진다. 사찰로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 수령 150년가량의 전나무 수백 그루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한낮에도 어둑어둑할 정도로 전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통과하는 과정은 산사로 들어가기 전 세속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내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다.
전나무숲을 지나자 이번에는 벚나무 터널이다.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해탈교를 건너면 키 작은 벚나무가 내소사로 안내하듯 나란히 심어져 있다. 매년 봄이면 푸릇푸릇한 전나무와 하얀 벚꽃, 천년고찰이 한데 조화를 이뤄 절경을 빚어낸다. 이 때문에 내소사를 찾아왔다가 전나무숲길과 벚나무길을 거쳐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전나무숲길과 벚나무길을 걷기 위해서 내소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꽃 피는 봄만큼은 아니지만 한적해진 길을 여유롭게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마지막 관문인 봉래루를 넘어서면 내소사다. 경내로 들어서면 그 뒤로 병풍을 두른 듯 펼쳐지는 관음봉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수령이 1,000년이라는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낮고 소박한 가람 배치가 주변과 하나로 잘 어우러진 전통 사찰의 모습이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과 대웅보전 문에 새겨진 꽃살문은 내소사의 또 다른 볼거리다. 소박하고 정갈한 내소사의 한국적인 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경내에는 300살이 넘은 보리수나무와 불자들이 하나둘 쌓아 올린 돌탑 등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풍경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소사에서 마음을 정화시켰다면 다음은 직소폭포를 보러갈 차례다. 다시 전나무숲길을 나오다 보면 길 중간에 우측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데 이 길로 계속 가면 관음봉삼거리를 지나 직소폭포까지 곧장 이어진다. 관음봉삼거리와 재백이고개 구간에서 짧은 오르막을 거쳐야 하지만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것보다는 완만하고 직소폭포 이후부터는 날머리인 내변산탐방지원센터까지 내리막이 이어져 주변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직소폭포로 가는 길에는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조용한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를 벗 삼아 걷다 보면 미선나무와 꽝꽝나무 같은 희귀 수종과 천연기념물 수달도 만나볼 수 있다. 직소폭포는 30m 높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압권이다. 직소폭포는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해서 실상용추(實相龍湫)로 불리며 내소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와 울창한 전나무숲을 일컫는 소사모종(蘇寺暮鐘)과 함께 변산 8경(景) 중 하나로 꼽힌다. 한겨울에도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물길을 따라 40분만 더 가면 내변산탐방지원센터까지 연결된다. 직소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이는 직소보부터는 '바람꽃길'이라는 이름의 산책로다. 왕복이 아닌 편도 코스를 추천하는 것은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다시 변산반도국립공원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736번 지방도 때문이다. 이 길은 고사포해수욕장 인근에서 내변산을 관통해 모항 인근까지를 연결하는데 30번 국도를 타고 오면서 놓친 내변산의 명소들을 엿볼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오다 중간에 내려 해안 도로를 따라 걷기도 그만이다. 부안 변산마실길 6코스인 '쌍계재 아홉구비길'이 바로 이 구간이다.
다시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처음 타고 왔던 30번 국도 나머지 구간으로 향하면 곰소항과 곰소항수산시장, 곰소젓갈단지, 천일염 생산지인 곰소염전을 지나 줄포IC까지 연결된다.
/글·사진(부안)=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