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공부의 신' 모인 전통이데올로기 유학 본산…학부모 순례지로 부상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12> ‘명·청시대 최고학부’ 국자감·공묘

우리의 성균관처럼 당대 최고 국립대학

황제가 직접 강습한 '벽옹' 중심으로

연못·유리패방 등 어우러져 학습 집중

바로 옆엔 공자 모신 사당 '공묘' 나란히

국자감 공부 → 제명비 등재 최고 영예

옛 수재 만나려는 학부모·아이들 북적

중국 베이징 국자감의 모습. 가운데 있는 것이 중심건물인 ‘벽옹’이다. 벽옹은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 황제가 직접 강학한 장소로, 전통 유학이데올로기의 국가지배를 상징한다. /최수문기자중국 베이징 국자감의 모습. 가운데 있는 것이 중심건물인 ‘벽옹’이다. 벽옹은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 황제가 직접 강학한 장소로, 전통 유학이데올로기의 국가지배를 상징한다. /최수문기자




“중국 명나라 상로(商輅·1414~1486년)는 저장성 춘안 출신이다. 저장성 지방 향시에서 1등을 한 후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했다. 이어 수도 베이징 회시에서 1등을 했고 마지막 자금성(쯔진청)에서 진행된 전시에서도 장원을 했다. 그는 3단계 과거 시험 모두에서 1등을 했다. 명나라 역사에서 유일한 사례다. 이를 연중삼원(聯中三元)이라고 한다. 관료 생활도 승승장구해 병부상서와 이부상서 등을 지냈다.”



이는 베이징 공묘(孔廟)에 세워져 있는 일종의 과거 급제자 명부인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상로라는 사람의 소개 글이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학부모라면 모두 눈이 번쩍 뜨일 내용이다. 지금 말로 하면 그는 ‘공부의 신’인 셈이다. 물론 그도 공묘에 있는 원·명·청 시대 과거 급제자로 기록된 5만 1,624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베이징 둥청구의 국자감과 공묘는 이런 옛사람을 만나려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국자감은 명·청 시대 최고 학부인 국립대학으로 우리나라의 성균관과 비슷하다. 공묘는 말 그대로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전통 이데올로기 유학의 본산인 이들 두 곳은 한 세트처럼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중국의 공식 명칭은 ‘공묘·국자감박물관’이다.

현재는 박물관 입구가 공묘 쪽으로 나 있어 관람객들은 공묘로 먼저 들어가서 구경하고 옆의 국자감으로 이동했다가 국자감 정문 쪽의 출구로 나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덜 산만한 국자감을 먼저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중국 내에서 국자감은 유일하지만 공묘는 지역마다 있는 것 중에 하나다. 규모로는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의 공묘에 이어 베이징 공묘가 두 번째라고 하기는 한다.

중국 국자감의 ‘벽옹’ 편액. /최수문기자중국 국자감의 ‘벽옹’ 편액. /최수문기자


국자감은 ‘벽옹’이라는 건물을 주위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구조다. 앞쪽에 문 형태의 유리패방이 벽옹을 지키는 모양새다. 주로 공부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구조가 복잡할 필요는 없었던 듯하다.



국자감 벽옹은 만주족 청나라의 가장 극성기인 건륭제 때인 지난 1783년에 만든 것이다. 건륭제가 여기서 강학을 했다고 한다. 즉 지존인 황제가 직접 와서 공부를 시킬 정도로 학생들이 대우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관료로서 막대한 혜택을 받았지만 또 전통 사회 유학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전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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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옹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꼽히는 주나라 때 있었다는 ‘대학’이다. 이름이 특이한데 한나라 때 정현이라는 사람의 풀이에 따르면 “벽은 밝다는 것이고 옹은 화합한다는 것이다. 즉 천하를 밝고 화합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벽옹이 둥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이채롭다. 이것도 다른 고사가 있다. 서기 59년 한나라 명제가 강학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와 질서 유지가 어려웠다. 이에 주위를 파고 물을 채워 넣어 억지로 사람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이런 사실들을 유리패방의 앞뒤 면에 있는 환교교택(?橋敎澤)과 학해절관(學海節觀)이라는 글씨가 되새긴다. 환교교택은 “다리 너머 듣는 가르침이 영원토록 전한다”이고 학해절관은 “배움의 바다에서 보는 것을 절제한다”는 뜻이다. 벽옹과 유리패방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 기와를 올린 것도 국자감의 위상을 말해준다.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감생’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자신의 이름을 공묘의 ‘진사제명비’에 올리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여겼다고 한다.

공묘의 입구 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제명비다. 모두 198개가 있다. 아쉽게도 현재 제명비의 상당 부분이 훼손돼 있다.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을 새긴 표면이 긁혀진 상태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문화 전통을 개조하겠다면서 파괴한 흔적이라고 한다. 베이징에 남아 있는 문혁 시대의 어두운 유산 중 하나다.

중국 베이징 공묘를 방문한 한 가족이 ‘진사제명비’ 비석들을 살펴보고 있다. /최수문기자중국 베이징 공묘를 방문한 한 가족이 ‘진사제명비’ 비석들을 살펴보고 있다. /최수문기자


공묘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대부분 ‘공자님과의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입구의 공자상 앞에서 멈춘다. 공자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대성전(大成展)이 나온다. 공묘의 중심 건물로 공자와 제자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대성전이라는 이름은 맹자가 공자를 평가하면서 말했던 집대성(集大成)에서 나온 말이다.

대성전에서 특히 볼만한 것은 편액이다. 건물 정면에 만세사표(萬世師表)를 시작으로 건물 안에는 도흡대동(道洽大同)·여천지참(與天地參) 등의 편액이 10여 개 걸려 있다. 전통 시대 황제들의 글이다. 각자 자신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여천지참은 건륭제, 만세사표는 강희제의 글씨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를 빼면 중국 베이징의 문화 유적지 가운데 국자감·공묘는 두 번째로 한가하다. 첫 번째는 자금성 앞에 있는 태묘로, 우리 식으로 하면 종묘다. 청 제국이 무너진 후 공화국이 세워지고 1919년 5·4 운동과 공산화를 겪으면서 중국에서 유학은 줄곧 배제돼왔다. 국자감과 공묘에서 고즈넉함마저 느끼는 이유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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