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부 이태규기자
지난 2019년 9월 최종구 당시 금융위원장은 이임식에서 “금융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시장 참여자를 힘들게 하는 근거 없는 시장 개입 요구는 늘 경계하고 단호하게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영혼 없는 관료’라는 말이 유행하던 당시 나온 금융 수장의 마지막 당부여서 화제가 됐다. 당시 최 위원장은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금융사에 과도하게 이것을 하라,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저것을 하라는 등의 요구가 있을 텐데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 것, 시장 참여자 자율의 근간을 저해하는 요구는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1년 반 전 금융위원장의 말을 다시 꺼낸 것은 최근 정치권의 금융 압박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말부터 여당은 금융권에 이익공유제 참여를 압박한 데 이어 ‘사회적 연대기금법’으로 아예 법제화에 나섰다. 여당 의원 10여 명은 임대료를 깎아주는 건물주에게 대출금리 인하 요구권을 주는 법안을 발의하는가 하면 재난 시 은행이 자영업자 대출 원금을 탕감해주라는 은행법 개정안도 나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금융 당국은 잘 보이지 않는다. 기업은 현 법인세 시스템하에서 돈을 잘 벌면 그만큼 높은 세율을 적용받아 많은 세금을 내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그렇게 5대 금융지주가 2019년 낸 법인세는 4조 9,069억 원으로 5조 원에 육박했다. 세금 체계를 뛰어넘는, 단순히 돈 잘 벌었으니 기부 좀 하라는 식의 정치권 요구에 당국은 뚜렷한 입장이 없다. 금리 인하 요구권은 돈을 빌린 사람의 신용이 올라갔을 때 주어지는 것인데 반대로 임대료를 깎아줘 수입이 줄어든 건물주에게 요구권을 주는 법안 역시 금융 상식에 반하는 것이지만 당국의 언급은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국회에서 한 말이다. 은 위원장은 재난 시 자영업자에게 빚 탕감 요구권을 주자는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그런 것은 금융사가 아니라 재정으로 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채무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면 신용 사회가 무너진다”고 받아쳤다. 코앞의 재보궐선거,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시장 원리를 무시하는 ‘정치 금융’은 더 심해질 것이다. 야당이 견제 기능을 상실한 지금, 그래도 국가 미래를 걱정할 관료가 몇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태규 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