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이 정치인·공직자들에게까지 번지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적폐 청산’ ‘촛불 정신’을 거론했다. 이번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을 정권 초 국정철학에 빗대며 강경 대처 의지를 다진 것이다. 여야 역시 특별검사제(특검) 도입에 한 목소리를 내며 대응에 나선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론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특권층 그 자체로 인식되는 정치인들과 정부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겨냥해 화살을 돌리기만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앞으로 공정성이 담보된 정부·청와대의 자체 조사 결과, 정부 합동특별수사본부의 빠른 수사 속도, 더 전방위적이고 구체적인 혁신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각계를 향해 쏟아지는 의혹과 논란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 “특권 세력이 투기장 만들었다”지만...LH에만 ‘철퇴’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14일 ‘LH 후속 조치 관계 장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정부는 특수본을 중심으로 불법 투기 의혹에 대해 사생결단의 각오로 철저히 수사하겠다”며 “결과에 따라 강력하게 처벌하고 불법 범죄 수익은 법령에 따라 철저하게 환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LH 사태는 그동안 쌓여온 구조적 부동산 적폐의 일부분”이라며 “지금까지 권력·자본·정보·여론을 손에 쥔 특권 세력들의 부동산 카르텔이 대한민국의 땅을 투기장으로 만들고 사람이 살 집을 축재의 수단으로 변질시켜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땅 짚고 헤엄치던 그들만의 부동산 축재, 이제 끝내야 한다”며 “LH 투기 비리 청산은 부동산 적폐 척결의 시작”이라고 공언했다.
정 총리와 관계 장관들은 그러나 회의에서 “국민 신뢰 회복 불능에 빠진 LH를 정비하는 특단의 조치로 뼈를 깎는 과감한 혁신을 단행할 것”이라며 △농지 제도 개선 방향 △투기 근절을 위한 LH 내부 통제 방안 등 주로 LH만을 겨냥한 대책을 논의했다.
세부적으로는 지난 정부 합동 조사 결과로 확인된 LH의 투기 의심자 20명의 농지를 수사 결과에 따라 신속하게 강제 처분하는 조치를 내리고 앞으로 LH 임직원은 실제 사용 목적 이외의 토지 취득도 금지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LH 임직원 토지를 전수조사하고 불법 투기와 의심 행위가 적발되면 직권 면직 등 강력한 인사 조치와 수사 의뢰도 단행키로 했다. 농지 제도와 관련해서는 농업경영계획서를 철저하게 심사하고 농지 취득 심사 절차도 강화하겠다는 방안을 검토했다. 반면 정치인, 고위 공직자 등 성역이 없는 대책은 아니었던 셈이다. 권력의 핵심인 정부가 ‘특권 세력’을 타자화 해 언급한 것도 어색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文대통령은 불현듯 ‘촛불정신·적폐청산’ 카드 꺼내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적폐청산, 촛불정신을 거론해 입도마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리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며, 가장 중요한 민생 문제라는 인식을 가져 주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여러 분야에서 적폐 청산을 이뤄왔으나 ‘부동산 적폐’의 청산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정부는 그와 같은 반성 위에서 단호한 의지와 결기로 부동산 적폐 청산과 투명하고 공정한 부동산 거래 질서 확립을 남은 임기 동안 핵심 국정 과제로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야당 측이 이번 LH 사태의 근본 문제로 지적한 공공 주도형 부동산 공급 대책과 관련해서는 “부동산 적폐 청산과 부동산 시장 안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택 공급을 간절히 바라는 무주택자들과 청년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정부는 예정된 공급 대책이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국회도 2·4 공급 대책을 뒷받침하는 입법에 속도를 내 서민 주거 안정에 힘을 보태 달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앞서 지난 9일과 10일에도 “2·4 부동산 대책 추진에는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12일에는 “부동산 적폐청산”을 언급했다. 이날 발언에도 ‘촛불 정신’만 추가됐을 뿐 기존 입장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결국 의혹 2주만에 사과...“공공기관 전체가 성찰해야”
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결국 의혹 제기 2주 만에 처음 나왔다. 문 대통령은 16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우리 정부는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혁파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면서도 “최근 LH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으로 가야 할 길이 여전히 멀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들께 큰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지난 2일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관련 의혹을 제기한 이후 14일 만의 첫 사과였다. 문 대통령은 “특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국민들께 큰 허탈감과 실망을 드렸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공기관 전체가 공적 책임과 본분을 성찰하고 근본적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낙연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대위원장도 17일 부산 연제구 민주당 중앙시당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회의에서 “우리 사회의 오랜 치부인 부동산 적폐를 청산하고 공직 사회를 투명하고 유능한 조직으로 만들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정부 여당으로서는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촛불정신을 완성해가는 노력을 국민들께 입증해드리겠다”고 강조했다.
반복되는 ‘적폐’라는 표현을 두고 곳곳에서 논란이 일자 결국 청와대가 부연 설명에 나서기도 했다. 청와대의 핵심관계자는 17일 “적폐청산은 분명히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온 잘못된 관행과 문화를 바로잡자는 것”이라며 “잘못된 관행이나 문화 같은 환부가 있다면 혁파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여론 악화에 여야는 특검 전격 합의…丁 “소는 누가 키우나”
문 대통령이 첫 사과를 내놓자 여야는 LH 투기 의혹에 대한 특검 도입과 300명 의원 전원에 대한 전수조사, 국정조사를 모두 실시한다는 데 전격 합의했다. 더 이상의 여론 악화를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자세였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6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의원에 대한 강력한 전수조사는 물론 특검과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특검법 처리 시한은 3월 국회 회기로 제시했다. 특검은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처음 제안한 카드였지만 전향적 자세를 이를 수용한 것이었다.
김태년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도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국민의힘의 특검 수용에 대해 “현명한 선택”이라며 “야당의 국정조사 제안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전수조사에 대해서도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능력 있는 기구를 설치하거나 기관을 선택해 조사하겠다”고 화답했다. 전수조사 대상에 청와대까지 포함하자는 야당의 주장에는 “현재 청와대 행정관까지 전수조사를 하고 있다”면서도 “청와대 발표에 대해 야당이 혹여 또다시 신뢰 문제를 제기한다면 청와대 전수조사 내용을 국회가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도 된다”고 밝혔다.
반면 정 총리는 18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특검 도입에 부정적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특검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특검이다, 특별위원회다 이런 식으로 장시간에 걸치면 소는 누가 키우나. 나랏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정 총리는 “특별위원회든 특검이든 제가 보기에는 정부 합동조사단보다 조사 역량을 갖추기 어렵다”며 “국회의원 전수조사에 대해 제대로 하려면 특수본에서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관련 수사의 주도권을 국회와 외부 기관이 아닌 정부 쪽에서 쥐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대목이었다.
靑 1명·공무원 23명 추가 투기 의심…모든 공직자 재산등록 추진
이런 가운데 청와대와 정부 2차 조사에서는 대통령경호처 소속 직원 1명과 23명의 공무원, 지방 공기업 직원 5명이 투기를 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9일 브리핑에서 “대통령경호처는 직원 본인과 직계존비속 3,458명에 대해 별도로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며 “직원 1명이 2017년 9월경 LH에 근무하는 형의 배우자 등 가족과 공동으로 3기 신도시 지역의 토지 413㎡를 매입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청와대에 따르면 경호처는 이 직원에 대해 지난 16일 대기발령 조치를 내렸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등에서도 신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서 이뤄진 부동산 거래 3건이 있긴 했으나 이는 투기로는 의심되지 않았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었다. 정부합동조사단은 공무원 23명 등을 투기 의심 사례로 특수본에 수사 의뢰하기로 했다.
민주당과 정부는 나아가 부동산 업무를 하는 공공기관 직원은 물론 국가직·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전원에게 재산등록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같은 날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 협의회에서 “부동산 관련 업무 공직자에 대해서는 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재산을 등록하도록 등록제 확대를 검토하고, 신규 취득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겠다”고 예고했다. 김태년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도 “부당이익이 있다면 3∼5배를 환수조치하겠다”며 “농지 투기 방지를 위한 농지법 개정을 추진하고 취득 후 불법행위에 대해 즉각 처분명령 등 처분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재산등록의무 대상자는 2019년 기준 총 142만 8,727명으로 집계된다.
국민 73% “정부 조사 신뢰 안 한다”…반전 쉽잖은 비판 여론
이 같은 당정청의 각종 시도에도 정치권과 특권층을 향한 국민적 비토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로 주저앉았다는 여론조사가 잇따르는가 하면, 서울시장 선거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특히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등 4개 여론조사 전문업체가 만 18세 이상 남녀 1,009명을 대상으로 지난 15~17일 실시해 18일 발표한 3월 3주차 전국지표조사(NBS·95% 신뢰 수준, 표본 오차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청와대와 정부 조사단의 발표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3%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23%에 그쳤다. 연령·지역·주택소유 등과 무관하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많았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라고 밝힌 응답자 중 51%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특수본의 수사에 대해서도 무려 74%가 ‘제대로 된 수사는 어렵다고 본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77%는 정부·여당의 수사나 재발 방지 논의를 두고도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LH 투기 의혹이 보궐선거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도 응답자의 82%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봤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12일 만 18세 이상 500명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95% 신뢰 수준, 표본 오차 ±4.4%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는 국민 57.9%가 ‘광명·시흥 3기 신도시 추가 지정을 철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응답했다. ‘부적절하다’는 답변은 34.0%에 불과했다.
적어도 국민들의 인식은 정부 자체 조사나 기존 공공주택 공급안 고수에 반대 의사가 분명한 셈이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설득, 공신력 확보, 또는 전격적인 철회가 있지 않고서는 무너진 신뢰를 단기간에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 이번 LH 사태도 현 정부 들어 내내 이어진 부동산 시장의 극심한 불안정만 없었다면 상황이 지금처럼 악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아니, 3기 신도시 지정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므로 의혹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수 있다. 지금 정부가 보이는 대응들은 부동산 시장이 이전 정부 수준의 안정성을 유지했을 때나 통했을 처방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