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년. 미국에서 순수 혈통의 버팔로가 멸종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미국 동물학자 윌리엄 템플 호너데이가 이들의 숫자보다 “숲의 나뭇잎 수를 헤아리는 것이 훨씬 쉬웠다”고 한 존재, 수만 년 동안 수백만 마리가 떼 지어 다니던 미국 서부 평원의 주인공은 지난 1880년대 초반 그렇게 사라졌다.
버팔로가 미국 서부에서 사라진 이유는 단 하나. ‘소’ 정확히는 ‘쇠고기’다. 당시 미국은 서부 개척과 산업 발전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도시 중산층과 노동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대규모 축산이 필요했다. 모국이었던 영국의 쇠고기 수요에도 대응해야 했다. 장애물은 서부를 차지하고 있던 버팔로와 인디언.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졌다. 한바탕 피바람이 분 후 평원은 오롯이 소들의 천국이 됐다.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버팔로의 멸종은 미국 생태계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미 서부 생태계의 다양성은 이렇게 끝장났다.
다양성은 발전과 진화를 보여주는 징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생물학의 바이블 ‘종의 기원’에서 “새롭고 중요한 변화는 자연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다양성을 증가시킨다”고 말했다. 다양성이야말로 진화의 최종적이고 긍극적인 결과라는 의미다. 다양성은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단어이기도 하다. 실제로 다윈에게 있어 모든 생물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유기체가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름답게 창조됐다는 견해는 나의 입장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암모나이트는 후세에 인간들이 표본실에서 보고 감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다윈의 지적대로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다. 목적이 존재를 우선하면 버팔로와 같은 비극이 생긴다.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다윈이 말하는 다양성이 존재하는가. 존재보다 목적이 먼저는 아닌가. ‘다름’을 ‘틀림’으로 배척하고 적대시하지는 않는가.
26일은 천안함 폭침 11주기다. 꽃다운 46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북한의 공격에 안타깝게 산화한 비극의 그날이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날이다. 다른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천안함은 정쟁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한쪽에게 천안함은 침묵과 외면의 대상이고 다른 쪽에게는 현 정부를 비난하는 도구다. 그 외의 다른 시각은 존재할 수도 없다. 공감과 나눔은 소외당했다. 천안함의 청춘들이 왜 비극의 주인공이 돼야 했는지, 생존 장병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살아가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다”라는 최원일 전 함장의 외침이 폐부를 찌른다. “젊은 생존 장병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면 진보가 어루만져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보수라면 천안함을 이용하지 말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호소에는 가슴이 아리다.
3년 전 제주도에서 열린 관함식 때 함상에서 우연히 만난 이름 모를 한 퇴역 해군 장교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천안함을 얘기하면 다들 피해요. 강요에 휩쓸리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하죠. 그럼 입을 닫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천안함의 아픔이, 장병들의 슬픔이 공감으로 다가올 리 없다. 그저 그들만의 천안함이요, 그들만의 희생이다.
천안함이 지나고 20일 후면 세월호 참사 7주기다. 똑같이 304개의 꽃봉오리가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인 날이다. 내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죽을 것 같았던 아픔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이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용하려는 이와 외면하려는 이가 내세우는 자신들만의 진실이 펼쳐질 터다.
모두가 지금은 혁신의 시대라고 말한다. 천안함 11주기를 맞는 우리의 자세도 공감으로 혁신해야 하지 않을까. 목적보다 사실 자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한가닥 기대가 혼자만의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