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있고 물이 있다. 문의 제목은 ‘달문’. 영어로는 ‘Moon Door’이니 달이 문(moon)이고 문이 문(門)으로 이어지는 말장난 같은 문이다. 문은 한국 전통 건축의 문살 형태이나 나무 문틀 대신 단청 안료로 그린 벽화다. 주황색과 갈색이 교차하는 북동문, 노랑과 빨강이 겹치는 북서문, 보라색이 점점 짙어지는 남서문, 초록이 파랑으로 변하는 남동문까지 총 4개의 ‘달문’이다. 달은 모양을 바꿔가며 순환주기를 반복하는데, 이 문들은 색을 바꿔가며 돌고 돈다. ‘언어유희’를 자유자재로 작업에 접목하고, 일상용품을 탁월하게 작품에 끌어 들이는 이슬기(49)의 신작들이다. 지난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올해의 작가상 2020’ 전시에 선보였다.
물은 유리병에 담겨 벽에 걸렸다. 투명한 데다 크기도 작아 자칫 못 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바다와 대륙을 어렵게 건너 온 ‘귀한’ 물이다. 프랑스에 사는 이슬기 작가는 ‘올해의 작가상’ 참여가 확정된 직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귀국 일정이 자꾸만 지연되던 지난해 6월 무렵, 작가는 세계 각국의 인연 있는 큐레이터들에게 ‘그곳의 강물을 보내달라’ 부탁했다. 알자스 레낭현대미술센터(CRAC알자스)의 예술감독 엘피 튀르팽은 작가의 요청을 받고 프랑스 일강과 스위스 라인강의 물을 담아 우편으로 보냈다. 작가는 유리공예가와 협업해 강의 지형을 떠올릴 수 있는 형태로 유리병을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담았다.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온 10개 남짓한 물병들은 소리 없이 색도 없이 그윽하게 걸린 채 전시장을 바라본다. 마치 코로나19 때문에 전시장을 방문하지 못한 작가의 지인들을 대신해 참석한 것처럼.
이슬기는 ‘공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작가다. 수공예 누비이불로 우리 옛 속담을 추상적으로 보여주는 ‘이불프로젝트U’를 계기로 2014년부터 그는 통영의 누비장인과 협업해왔다. ‘바구니프로젝트W’는 멕시코 오악사카 원주민과, ‘나무 체 프로젝트O’는 프랑스의 나무 체 장인들과 함께 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구상하며 “과거의 전통 가옥에서 달(月)은 창호지를 바른 문살을 통과해 방안에 마술적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라 착안해 ‘동동다리거리’라는 전시 제목을 짓고 한국의 전통 문살에서 영감을 받은 공간을 설치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느 때처럼 협업을 고려해 신작을 계획했는데 팬데믹이 발목을 잡아 고립의 시간이 길어졌다. 결국 문살의 대안으로 단청 장인과 협력해 벽화 ‘달문’을 제작했고, 창호지 너머로 스민 은은한 달빛을 대신해 민요 부르는 할머니들의 노랫소리가 전시장을 채우게 했다.
노래는 놀이에서 가져왔다. 아이들이 마주앉아 서로 다리를 끼우고 노는 ‘다리세기’의 민요가 울려 퍼진다. 전시장 한쪽에는 유럽의 옛날 실내 게임 ‘바가텔(Bagatelle)’의 나무판이 놓였다. 바가텔은 핀이 박히고 경사진 나무판 위에서 구슬과 채를 이용하는 방식이 당구와 핀볼을 접목한 듯한 게임이며, 일본 파친코의 옛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놀이다. 왜 이 노래와 놀이가 공존하는가. 전시 평론을 쓴 엘피 튀르팽은 과거 ‘바가텔’이라는 단어가 성적(性的) 의미를 지녔고, 게임판의 구멍과 못들의 구성이 여성의 몸 또는 성을 연상시킨다는 점, 여인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노래와 함께 프랑스 속어에서 ‘달’이 ‘엉덩이’를 의미한다는 점을 들춰냈다. 그러고 보니 이지러지는 달을 연상시키는 4개의 ‘달문’이 볼록한 엉덩이, 만삭의 배와 닮았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작가는 지난해 3월 귀국하려 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8월에야 겨우 한국에 들어왔고, 장인과 협력해 전통문살을 제작하고 창호지 너머로 달빛 분위기를 조성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면서 “작가로서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을테고, 전시 일정에 맞추기 위해 전통방식을 무시한 채 편법을 쓸 수도 있었건만, 완강히 거부한 대신 단청 장인들과 벽화를 그리는 것으로 선회했다”고 전했다. 이 학예사는 “벽화작업 또한 무형문화재 단청 장인들에게 그냥 맡길 수 있었으나 작가는 개막 일주일 전까지도 전통기법을 전수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며 “결과에 급급하지 않고 공동의 과정을 중시하며 흔들림 없이 작업에 임하는 작가적 태도가 훌륭했다”고 말했다. 전시장 곳곳에 세워진 문살들은 그 치열하고 성실한 과정, 실험과 시행착오의 산물들이다.
이슬기 작가는 ‘올해의 작가상 2020’의 최종 수상자로 뽑혔다. 심사위원단은 이슬기의 작품에 대해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장소특정적 설치로 전통을 현대적이면서도 유희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코로나 시대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은유를 섬세한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스무살 무렵부터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슬기는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팔레드도쿄 등지의 그룹전에 참가했고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의 한정판 캐시미어 퀼트 콜라보 작업, 가구 전문 브랜드 이케아(IKEA)와 한정판 아트 러그(Art Rugs) 프로젝트 등을 함께 했다. 전시는 4월 4일까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