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 가지마다 하얗고 작은 꽃망울이 팝콘처럼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개화가 예년보다 일주일 정도 이르다는 말에 지구온난화 탓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봄 내음을 품은 꽃망울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그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지방 벚꽃 명소에서 서울 사람들이 나들이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눈치다. 정부에서도 꽃구경 자제를 계속해서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꽃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계절인 것을 어찌하랴. 그래서 비교적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즐길 수 있는 수도권 벚꽃 명소 몇 곳을 찾아봤다.
화신(花神)이 온 순서에 따라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분당 탄천 자전거 도로. 3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탄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벚나무 가지에 꽃망울이 하나둘 맺히더니 하루가 다르게 붉은빛을 더해 갔다. 그러고는 3~4일 정도 흐르니 꽃망울들이 팝콘처럼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지대가 높은 남쪽에서 시작하는 탄천은 북으로 북으로 한강을 향해 벚꽃의 개화를 이끌며 달린다. 내친김에 남산 순환도로 변에 핀 벚꽃 구경도 나선다.
서쪽에서 밀려 온 황사가 종종 하늘을 가리지만 그럼에도 꽃망울은 가지 틈을 뚫고 기어이 솟아올랐다. 서울 장충동 방면에서 시작한 순환도로의 벚꽃은 남산을 띠처럼 둘러쌌다. 예년 같으면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을 곳에서 한적함이 느껴진다.
순환도로를 따라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남산 한옥마을이다. 역시 찾는 이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꽃은 찾는 이가 없어도 자신들만의 축제에 빠져 있다. 매화나무는 꽃송이가 조밀해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국악당 인근 진달래 군락도 흐드러졌다. 맑고 푸른 하늘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테지만 어디 세상만사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대로 전개될 수 있을까.
필동으로 빠져나와 충무로역으로 가는 길에도 양쪽 가로수가 모두 벚나무다. 을지로 쪽에 번성하던 인쇄소들은 비싼 임대료에 밀려났는지 이제 남산 기슭에 빼곡히 들어찼는데, 하얀 벚꽃 가지가 인쇄소 간판들을 가리고 있다.
충무로 벚꽃을 뒤로하고 광화문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경복궁 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부암동 윤동주문학관에 다다르자 마치 꽃 대궐에 들어선 듯하다. 문학관 건물 옆 시인의 언덕엔 산수유와 매화·벚꽃이 한데 모여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지켜보는 이 없어도 하늘에선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땅에선 생명의 기운이 샘솟아 오르니 꽃들에겐 지금이 최상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다시 서울 한양도성 ‘인왕산 자락길’로 가본다. 사직단에서 시작돼 부암동까지 3.2㎞ 구간이 이어진다. 이 구간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의 배경이 된 수성동 계곡,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집이 있었다는 인연으로 생긴 ‘시인의 언덕’ 등 유서 깊은 흔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시민들이 언제든지 계절을 만끽하기 위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계속되는 코로나19 우려 속에 하늘을 뿌옇게 만드는 황사의 습격까지 계절을 마음껏 즐기기가 어려운 나날이다. 그래도 봄은 어느새 우리 곁에 왔고, 꽃들은 말없이 세상을 위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간다. /글·사진=우현석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