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로 인해 블라인드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됐다. ‘층수가 높아서 안 들려. 개꿀(좋다는 뜻의 비속어)’이라는 글로, LH 본사 앞에서 열린 부동산 투기 규탄 집회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직장인의 애환을 털어놓는 소통 창구이자 대한항공 ‘땅콩 회항’ 등 갑질 폭로의 공간이었던 블라인드의 역기능에 사회적 시선이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해당 글은 LH 부동산 투기에 대한 비판 여론에 기름을 붓는 동시에 익명의 글을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던졌다.
블라인드는 직장인의 해방구였다. 블라인드가 직장인들의 ‘마음’에 빠르게 파고든 것은 기존의 익명·사내 게시판과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회사 e메일 하나로 가입할 수 있는 등 참여 방법이 쉬웠다. 같은 기업군이나 회사로 묶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고 이는 수많은 클릭 수로 이어졌다. 익명으로 회사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강점으로 부각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하듯이 수시로 접속한다”는 단골손님이 날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정도다. 이들은 “늘 불만이었던 인사·연봉 등 내 회사 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글이 올라오면 통쾌함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게다가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자는 폭로 글로 인해 블라인드를 찾는 발길은 더 늘었다. 블라인드가 스포츠 스타, 연예인의 학교 폭력을 세상에 알린 온라인 커뮤니티 ‘네이트판’과 함께 사회문제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창구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LH 사태에 이은 몇몇 글로 상황이 달라졌다. LH 직원이 썼다고 추정되는 글은 익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막의 위험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익명성이 타인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용어로 ‘탈금제 효과’다. 익명으로 자유롭게 표현이 가능해지면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 태도가 무분별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김종길 덕성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프라인에서는 신분과 지위 탓에 자기 통제 효과가 있는데 온라인에서는 (이 효과가) 확 풀리게 된다”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폭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블라인드에 속한 기업도 속앓이 중이다. 근거 없는 폭로로 피해를 본 기업 가운데 일부는 결국 블라인드 글을 외면하는 상황이 됐다. ‘기업 문화를 바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는 블라인드의 목표가 깨진 것이다. 블라인드 글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는 중견기업 B사 관계자는 “내부 익명 게시판에는 사안마다 답변을 남기는 식으로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며 “직원들 사이에서 ‘왜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지적받느냐’는 식의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B사는 몇 년 전 한 간부가 부하 직원을 때렸다는 의혹을 제기한 글이 올라와 진상을 파악했는데 허위로 밝혀졌다. B사의 익명 게시판은 사내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제보로 올라오면 제보자가 아닌 당사자만 조사하는 식으로 또 다른 블라인드로 운영된다.
하지만 자칫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질 수 있어 여론에 민감한 소비재 기업은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블라인드를 예의 주시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기업들이 블라인드 글을 감시한다거나 글 삭제를 요구한다는 소문으로 번졌다. 의견 개진 자체를 막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짙어졌다는 기업도 있다고 한다. B사 관계자는 “블라인드에 오너에 대한 글이 올라온 회사에서 휴대폰 1,000개로 동시에 글 삭제 요청을 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돈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에 블라인드마저 소개팅·번개팅 등 일탈 창구로 활용되면서 블라인드만의 고유 기능이 퇴색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학계에서는 블라인드가 고발을 통한 사회 자정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표현의 자유는 본질이 익명에 가깝다”며 “‘계급장’을 다 공개한 후의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 정말 표현의 자유인지, 표현 전에 자기 검열이 이뤄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구성원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야 (무분별한) 익명 폭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며 “사회적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익명이 자리한 공간이 작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규제보다 우리 사회의 신뢰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우선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익명 폭로는 우리 사회에 권력 구조가 있고 이 구조가 은폐됐기 때문에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며 “공론의 장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방식을 교육과정에서부터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도 “법적 규제 강화는 (블라인드의) 장점이 없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며 “커뮤니티가 유지될 수 있는 약속을 한 후 이를 담보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종곤·김태영 기자 ggm11@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