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이 세계적인 호황을 맞아 수출과 경제 성장을 떠받치고 있지만 다른 제조업은 가동률이 추락 수준으로 침체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필두로 한 정보통신기술(ICT) 부문과 일반 산업 간 양극화도 심화하는 양상이다. 경기 침체 속에 산업의 구조적 변화는 실업 확대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지만 정부가 반도체 ‘착시 효과’에 빠져 노동 개혁 등을 뒤로 미루며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1일 산업통상자원부의 ‘2020년 연간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액은 지난해 991억 7,800만 달러(약 111조 원)로 전년 대비 5.6% 증가했다. 반면 10대 수출 품목 중 반도체와 바이오헬스를 제외한 모든 품목의 수출액은 감소했다. 반도체 다음으로 수출 규모가 컸던 일반 기계의 수출액은 479억 3,100만 달러(약 54조 원)로 반도체 수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주요국 대비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제성장률(-1.0%)을 기록한 것은 상당 부분 반도체 산업의 호황 때문으로 해석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말 “광공업 및 투자 개선세에 힘입어 지난 2월 전(全) 산업 생산이 2.1% 증가하면서 1년 전 위기 이전 수준까지 회복했다”고 긍정 평가했지만 이 역시 반도체 제조업 생산능력지수가 올 2월 전년 대비 15.1%나 오른 것이 주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반도체를 제외한 8대 수출 품목(일반 기계,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석유제품, 선박, 자동차 부품)의 생산능력지수는 1% 내외에서 오르거나 하락하기도 했다.
반도체 착시 현상은 수출 경쟁력에서도 확인돼 ICT 산업과 비(非)ICT 산업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날 지적했다. ICT 부문과 비ICT의 수출 고도화지수는 2000년 각각 95.8포인트·92.1포인트로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2019년에는 각각 157.3포인트·136.3포인트로 격차가 확대됐다.
문제는 미국·중국 등이 반도체에 수십조 원씩 투자하며 추격의 고삐를 당기고 있어 K반도체가 ‘초격차’ 경쟁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은 반도체 설비 투자액의 40%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기로 했고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170조 원의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투자로 반도체 산업의 부가가치가 떨어지면 반도체에 편중된 한국 제조업의 전체 경쟁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셈이다. 김태윤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전략팀장은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어 당분간 문제가 없겠지만 ‘반도체 이후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 점은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특히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면 침체된 고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는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지난해 연간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21만 8,000명 줄었다. 취업자 감소 규모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 127만 6,000명이 줄어든 후 최대였다. 한국은행 산하 경제연구원은 ‘산업구조조정이 고용 및 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경기하강기에 진행되는 산업구조 변화는 실업을 늘리는 부정적 영향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장기 실업자는 2014년을 기점으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한은에 따르면 2000~2013년 월 평균 31만 8,000명에 머물던 장기 실업자는 2014~2018년 43만 4,000명으로 급증했다.
정부도 반도체 의존 심화의 문제점과 산업 재편의 필요성을 알고 있지만 여당이 장악한 국회가 친노동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어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추진하지는 못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기업 창업주가 연로한 경우 새로운 비즈니스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고 노사 문제도 얽혀 있어 현실적인 재편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현실 진단에만 머물렀다.
/세종=박효정 기자 j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