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은 남다른 향수를 품고 있다. 본래 이곳은 지난 1938년 4월 27일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 호텔인 반도호텔 자리였다. 그보다 앞서 1888년에 인천항 개항과 함께 세워진 대불호텔 등이 있지만 여관 수준이었던 이들과 달리 반도호텔은 지하1층, 지상 8층에 객실을 둔 본격적인 호텔의 시작이었고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일본인 노구치가 주인이던 반도호텔은 해방 이후 미군 사령부 사무실과 장교 숙소로 쓰이다 1953년 8월 한국 정부에 인수됐다.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가 주요 호텔들을 운영하다 1970년대부터 민간 자본의 호텔 참여를 독려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롯데 창업주 신격호(1922~2020) 회장은 1974년 6월 반도호텔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이곳에 롯데호텔 건설을 추진한다. 일명 ‘비원(秘園) 프로젝트’로 불린 신 회장의 구상에 따라 ‘한강의 기적’ 속에 한국 전통미를 품은 37층 높이 롯데호텔이 1978년 말 완공돼 1979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이 안에서 한국미를 과시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로비의 그림들이다.
소공동 롯데호텔 정문으로 들어서서 왼쪽, 2·3층 연회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자.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올 때도 거치게 되는 이곳의 나무색 벽면은 벽이 아니라 작품이다. 탐스럽게 둥근 등을 가진 거북이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거린다. 그 주둥이 끝에서 생명의 기운 같은 입김이 뿜어 나온다. 거북은 제 등껍질과 같은 곡률을 가진 파도를 타고 넘실댄다. 반대편 끝에는 물 부딪힌 돌산 절벽 여기저기에 불로초가 피어올랐다. 꽃같이 고운 그 위로 사슴 한 쌍이 노닌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이들을 내려다보며 날고 있는 학 무리를 코앞에서 만나게 된다. 나무색 작품 속에서 학들만 흰 깃털, 붉은 이마, 검은 주둥이를 가졌다. 질감도 다른 목재와 다르다. 학들은 굽이치는 구름을 둘러쌌고, 구름은 또 둥근 태양을 떠받친다. 색 없이 나무 조각의 배열만으로 이 모든 십장생을 구현한 이는 우리나라 공예 1세대 작가 백태원(1923~2008). 3개 층 높이 벽면 전체를 채운 작품은 그의 1978년작 ‘장생도’다. 벽 크기에 맞춤한 것이 호텔 건립 때 특별히 의뢰받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신 회장의 생전 집무실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었을 정도로 사랑받은 작가다.
백태원은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태어나 태천 칠공예 학교를 졸업하면서 공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7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전시는 우리나라 공예가 최초의 개인전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나전칠기 기법을 익혔고 이를 현대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으며 수공예와 산업 공예를 넘나들었다. 요즘은 ‘디자이너’라 불리는 숱한 공예가 후학도 양성했다. ‘공예계의 김환기’인 셈이다. 청와대 본관의 실내 장식, 대한항공 747 점보 여객기 제1호기 실내장식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백태원은 전통 문양을 소재로 삼되 현대적 표현법을 연구했다. 조형미가 최우선이나 기능성과 실용성도 중시했다. 그의 장식장·머릿장·가리개 등 가구와 조명·병 등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목록에도 들어 있다.
롯데호텔에 설치된 이 대작은 자연에서 얻은 모티브를 단순하게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했다. 몇 해 후면 제작한 지 50년이 될 이 작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하다. 에스컬레이터에 가로막혀 작품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오르내리며 가까이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별미다. 특히 3층에서 내려다본 장면은 학 무리의 일원이 된 듯 독특한 시선을 경험하게 한다. 이와 유사한 작품이 대신증권 여의도 본점 1층에도 있었다. 1985년작인데, 2016년 10월 대신증권이 명동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벽에서 분리, 해체됐다. 벽화부조의 특성상 한 번 설치하면 장기 지속할 수 있어야 하기에 고민하던 대신증권 측은 2019년 위례로 이전한 대신증권 연수원으로 작품을 이전했다. 아직 전시는 못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장생도’ 양쪽에 그림이 각각 걸려 있다. 한국화가 곽석손(72)의 2000년 이후 대표작으로 꼽히는 ‘축제’ 두 점이다. 홍익대 재학 시절 천경자·박생광·조복순에게 정통 한국 채색화를 배운 화단의 거장이다. 꽃 무더기 위로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인데 “무리 지은 것들의 군집미”를 강조하는 작가는 실상과 허상을 넘나드는 나비를 통해 기다림과 설렘, 나아가 번영과 확장을 기원한다.
다시 정문 앞 리셉션 쪽으로 다가가면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1929~2021)의 그림 ‘회귀’와 마주친다. 주황색이라기보다는 생명력 품은 붉은 흙색 한지 바탕에 천자문이 적혔고 그 위에 물방울이 알알이 맺힌 작품이다. 5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며 붓을 잡고 글을 깨친 화가는 환갑 이후 자신의 본질, 우리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회귀’ 연작을 그렸다. 거침없는 산업화와 세계화 와중에 ‘전통미’를 생각했던 롯테호텔의 숙고도 감지된다.
그 오른쪽, 로비라운지 페닌슐라 안쪽에는 또 다른 백태원의 수작이 있다. 벽을 차지한, 세로로 긴 4점의 검은 작품이다. 옻칠 바탕에 섬세한 자개로 그려낸 춘하추동의 사계절 산수다. 수려한 산세, 정겨운 초가를 배경으로 나귀 타고 길 떠나는 선비가 있는가 하면 신비로운 선계(仙界)를 바라보는 신선도 등장한다. 어느 풍경에 자신을 갖다 놓더라도 설레고 흐뭇할 작품이다. 2층 높이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폭포까지 그림 같은 풍광이니, 백태원의 작품 4폭에 이어 자연이 다섯 번째 화폭을 채우는 셈이다.
맞은편 벽은 대조적이다. 화려한 의상의 무희들이 등장해 별안간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들뜨게 하는 한봉호(1921~2016) 화백의 ‘플라멩고’가 걸려 있다. 230×730㎝(1,500호) 크기의 초대형 작품이라 제작에만 5개월이 걸렸고 사용된 물감만 20상자라고 한다. 1982년 설치될 당시 1톤 무게의 작품을 안전하게 부착하기 위해 호텔 측은 오래 고심했다고 전한다. 30년 이상 이곳에 근무한 호텔 관계자가 “플라멩고 근처가 맞선 성혼율이 높은 자리로 한동안 유명했다”고 귀띔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공동 롯데호텔 서울은 본관인 메인타워와 2018년 새 단장해 개관한 별관 이그제큐티브 타워(EX타워)로 나뉜다. EX타워 1층은 그야말로 ‘롯데스럽다’. 익히 알려져 있듯 롯데의 기업명은 신 회장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은 후 샤롯데를 향한 사랑에 자신의 생명까지 불사를 수 있었던 베르테르의 열정을 따서 지었다. 그 소설 속 장면을 그려놓은 듯 바로크풍 느낌의 그림들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EX타워의 로비는 15~16층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공중에 두둥실 뜬 푸근한 도자기가 반긴다. 국내 최고급 호텔들이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작가 박선기의 최근작이다. 투명한 나일론 끈에 크리스털이나 숯을 매달아 특별한 공간감을 이루던 작가가 이번에는 숯에 금을 발라 3D 입체를 구현했다. 대기에 뜬 먹그림 같다. 이곳 로비는 한국미의 정수를 도자기, 특히 백자 달항아리로 보고 그에 맞춰 작품을 내걸었다. 최영욱의 ‘달항아리’, 한진섭의 벽화형 설치 작품 ‘까치와 호랑이’는 외국인 방문객들이 더 반길 법하다. 창밖으로는 도심을 에워싼 산과 마천루가, 로비 안에서는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룬다. /글·사진=조상인기자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