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모든 갈등과 차이가 사라진다면, 행복할까

작가

차별 방지 위해 차이 없애는 세상

감시·통제로 유지되고 자유 없어

갈등은 때론 우릴 힘들게 하지만

화해 하려는 인간의 노력 빛 발해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세상 모든 차별과 차이가 없어져버린다면 진정한 유토피아가 될까. 피부색의 차별, 머리색깔의 차이, 뛰어난 존재에 대한 질투심도 사라지며, 심지어 온 세상이 흑백으로 뒤덮여버리는 세계. 로어 로우리의 ‘기억전달자(the Giver)’는 그런 세상을 정말로 그려낸다. 주인공 조너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머리색깔도 알지 못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그들의 눈에는 실제로 세상 전체가 흑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없어진다. 적어도 겉으로는. 국가가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모든 감정들은 엄격하게 통제되기에,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빠져 사회를 교란하는 사람들은 ‘임무해제’(죽음을 의미)된다. 모두가 섬세한 유전자 조합의 기술로 ‘제조’된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12세가 되면 인생의 모든 것이 국가의 힘으로 정해진다. 12세가 되는 순간 거대한 집합소에 모여 ‘미래의 직업’을 정해주는 집단적 의식이 거행된다. 차별과 차이가 일상이 되어버린 생활도 행복하지 않지만, 차별과 차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오직 통제만이 존재하는 이런 세상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너스는 12살이 되는 순간 이 마을에서 딱 한 명만 선정되는 자리, 즉 ‘기억보유자(the Recieiver)’의 역할을 배정받게 된다. 모든 사회적 책임이 면제되며, 기존의 기억전달자로부터 인류의 잃어버린 기억을 전달받는 역할만을 해내면 된다. 오직 기억보유자만이 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계 이전의 ‘원시적인’ 시대에 대한 기억을 보유할 수 있다. 색깔도 음악도 예술도 사랑도 전쟁도 갈등도 특별함도 열등함도 몰랐던 조너스는 과거의 기억전달자로부터 그 모든 인류의 유산을 전달받으며 미칠 듯한 괴로움에 사로잡힌다. 인류가 이토록 복잡하고, 고통스러우며, 무시무시하게 창조적인가하면, 끔찍하게 사악한 존재였다니. 조너스는 전쟁과 살육의 기억을 전달받고 고통스러워하며,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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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당국의 심사를 받아 적절한 사람을 선택 당해야 하고, 직업은 물론 사는 곳까지 늘 통제 당하며, 스피커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거의 24시간 내내 지시를 받고 감시를 당한다. 이 공동체의 이상은 ‘늘 같은 상태(Sameness)’를 유지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차별이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차이’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획일적인 세상은 얼마나 무서운 감시와 통제 속에서 유지되는 것인지. 폭력도 가난도 편견도 불의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소름끼치고 부자연스러우며 어떤 자유도 없는 세계. 심지어 꿈까지 검열당하고, 온갖 잡생각까지도 검열 당하는 사회. 이것은 결코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갈등 없는 평온은 때론 죽음과 같은 권태일 수도 있다. 갈등은 때론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갈등이 있기에 조화와 화해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한다.

기억이 나를 습격할 때도 있고, 기억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순간도 있다. 때론 나쁜 기억만 쏙쏙 골라내어 말끔하게 편집하는 기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나쁜 기억의 아픔을 상쇄하는 좋은 기억의 아름다움을 안다. 고통을 이겨내어 끝내 긍정적인 기억 또한 나쁜 기억의 어둠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생긴 것임을 깨닫는다. 슬픈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도 당황하지 말자. 그럴 땐 잊지 말자. 아픈 기억조차도 결국 나의 나다움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일부임을. 기억을 글로 쓰고, 기억을 영화로 만들고, 기억을 문학과 음악과 미술로 빚어내어 온갖 방법으로 저장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전진해 왔음을. 당신의 기억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나쁜 기억조차도 좋은 기억과 버무려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제3의 기억으로 만들 줄 안다. 그 어떤 아픈 기억들조차도 결국 나를 빚어내는 정신의 토양으로 만드는 마음의 기술, 그것이 진정한 내적 성장의 비결이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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