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명13릉’의 하나로 명나라 만력제 주익균의 무덤인 정릉 입구에는 ‘무자비(無字碑)’로 불리는 석비가 있다. 보통 무덤 앞의 비석은 무덤 주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역할을 한다. 특이하게도 만력제의 비석에는 한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그는 48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너무 형편없어서 기록될 공적이 한마디도 없었다고 한다.
만력제는 10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28세 때부터 자기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해 6년간(1584~1590년) 당시 국가재정의 2년분에 해당하는 예산을 투입했다. 실제 무덤은 만력제가 죽은 1620년부터 사용이 됐다. 당시 면적 18만 ㎡에 건물 300여 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현재 발굴된 ‘지하궁전’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정릉의 지하 27m 아래 묘실에서 발굴된 유물은 부속 건물에 전시해 놓았는데 금실로 짠 왕관 등 화려했던 명나라 궁중 문화를 보여준다.
황제의 무덤 욕심이 나라를 망친 중국의 역사가 명나라에서도 재연됐다. 무덤 건설비는 전적으로 농민들에게서 착취했다. 중국에서는 명군으로 불리는 영락제 주체지만 그의 치세도 중국인에게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카인 2대 건문제와의 4년간에 걸친 내전과 신수도(베이징)·자금성 건설, 몽골에 대한 잇단 원정에 더해 그도 총면적 12만 ㎡ 규모의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게 했다.
이런 궁궐급 왕릉이 명나라 220여 년 동안 13개가 세워졌다. 결국 명나라는 만력제가 죽은 후 24년 만에 내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멸망했다. 농민들이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불을 지른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chs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