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29·토트넘)이 지난달 26일(한국 시간) 카라바오컵(리그컵) 결승 뒤 눈물을 보였다. 0 대 1 패배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요즘 말로 나라 잃은 표정이었다. 상대 팀인 맨체스터시티 선수들도 줄줄이 다가와 토닥일 정도였다.
6년째 뛰는 토트넘에서는 물론 2010~2011시즌 프로 1군 데뷔 이후로도 11시즌째 우승이 없는 손흥민이다. 대표팀에서 이룬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유일한 우승.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 해서일까. 토트넘 팬 사이트에 올라간 경기 영상의 댓글에는 “한 게 없다” “왜 울지?” 등 ‘악플’이 많았다. 팀 슈팅이 2개에 그칠 만큼 토트넘의 흐름 자체가 답답했는데 슈팅 0개의 손흥민이 애꿎게도 비판 여론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영국 매체 풋볼 런던은 지난 1일 “토트넘은 ‘손흥민 딜레마’에 빠져 있다. 2020년의 페이스는 정말 좋았지만 2021년은 주춤하다”면서 “라이언 메이슨 감독 대행은 하루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리그컵 결승 뒤 첫 경기인 3일 셰필드와의 2020~2021 잉글랜드 프로 축구 프리미어리그(EPL) 34라운드 런던 홈 경기. 풀타임을 뛴 손흥민은 풋볼 런던으로부터 평점 9점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손흥민 딜레마를 언급했던 이 매체는 골 장면을 두고 “(14골 7도움으로 활약한) 2020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고 했다.
손흥민은 1골 1도움을 올리며 팀의 4 대 0 대승에 앞장섰다. 1 대 0이던 후반 16분 역습 상황에서 오른쪽의 손흥민이 특유의 스피드로 치고 나가며 중원의 개러스 베일에게 패스했고 단독 드리블한 베일은 골키퍼와 1 대 1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손흥민의 올 시즌 EPL 10호 도움이었다. 이로써 손흥민은 두 시즌 연속 10골 10도움(10-10)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토트넘 구단 역사상 최초 기록이다. 위르겐 클린스만부터 에마뉘엘 아데바요르, 크리스티안 에릭센, 해리 케인까지 전·현직 토트넘 스타 플레이어들은 모두 한 차례씩 10-10을 달성했을 뿐이다. 올 시즌만 놓고 보면 10-10 달성은 해리 케인(21골 13도움)과 브루누 페르난데스(16골 11도움), 손흥민까지 EPL 전체에서 3명뿐이다.
손흥민은 후반 32분 쐐기 골까지 터뜨렸다. 페널티 아크 왼쪽에서 간단한 속임 동작으로 수비를 제치고는 오른발 감아 차기로 골문 구석을 찔렀다. EPL 사우샘프턴전 페널티킥 이후 2경기 만의 득점 포.
올 시즌 EPL 16호 골이자 시즌 전체로는 21호 골(유로파리그 4골, 리그컵 1골 포함)이다. 이 득점으로 손흥민은 2016~2017시즌 세웠던 자신의 한 시즌 최다 득점 21골과 동률을 이뤘다. 시즌 종료까지 아직 4경기가 남아 있어 신기록 작성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손흥민은 또 역대 한국인 유럽파 리그 최다 골 기록에도 바짝 다가섰다. 이 부문 기록은 ‘차붐’ 차범근(68)의 17골. 1985~1986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남긴 기록으로 당시 득점 4위에 올랐다. 16골의 손흥민은 타이 기록을 넘어 신기록 수립도 가능하다.
7년 만에 친정 토트넘으로 돌아온 베일이 이적 후 처음으로 해트트릭을 달성했지만 이날 EPL 사무국이 선정한 경기 최우수선수(MVP)는 손흥민이었다.
다음 경기는 오는 8일 리즈 유나이티드전.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의 마지노선인 4위(첼시)에 승점 5점 뒤진 5위(승점 56) 토트넘은 리즈마저 잡아야만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갈 수 있다. 7개월 만의 EPL 2경기 연속 골로 미소를 되찾은 손흥민이 막판 스퍼트의 선봉이다.
/양준호 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