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여왕이 검은 옷에 흰 장식과 진주를 좋아한 이유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시대의 얼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품 78점

셰익스피어부터 에드 시런까지

초상화는 사진이 포착 못하는 감성 담아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여왕은 항상 그랬다. 그저 젊게 보이고만 싶은 게 아니라 투명에 가까운 순수, 그러면서도 충만한 위엄이 초상화에 담기길 바랐다. 백옥같이 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얼굴은 ‘순백’ 그 자체다. 그의 살결을 떠받친 어깨 장식의 진주는 여왕이 가장 선호한 보석 중 하나인데, 순결과 불변을 상징한다. 검은 바탕 옷에 하얀 레이스 장식의 소매깃처럼 흑백 또한 그의 상징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왕의 순결을 암시했다. 가슴 한가운데 불사조 장식도 순결과 재생을 뜻한다. 엘리자베스1세는 불사조, 새끼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펠리컨을 자신의 상징으로 내세워 헌신적이고도 영원한 여왕으로 숭배받고자 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붉은 장미는 튜더 왕징의 상징이다.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적외선 촬영 이미지로 밑그림을 보면 눈의 위치는 조금 더 위쪽으로, 코의 길이도 바뀌어 완성됐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공식적인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여왕이 그림 수정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양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초상화는 그림 속 인물의 권위를 느끼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낮은 곳으로 시선을 향한 넬슨 만델라의 초상 등 시대가 변하면서 초상화가 권력을 보여주는 방식도 달라졌음을 여러 전시작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전시 전경.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전시 전경.


이 여왕의 초상을 비롯한 영국의 국보급 초상화 78점이 한국에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최근 개막한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를 위해서다. 지난 1856년 설립된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품들로 이 중 26점은 처음 영국 밖으로 반출된 것이며, 출품작 모두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전시장으로 들어가 처음 만나는 초상화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1600~1610년경 셰익스피어 생전에 제작돼 전하는 유일한 회화 형태의 초상화로, 지난 1856년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창립될 당시 최초로 소장한 작품이다. 그 옆에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읽으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큰 20세기 시인 딜런 토머스의 초상이 자리 잡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에드 시런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에드 시런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정면을 응시한 눈빛이 금방이라도 화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찰스 다윈의 초상화, 아름다운 노래를 머금고 사색에 잠긴 붉은 더벅머리의 음유시인 에드 시런의 초상을 비롯해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민중의 왕세자비’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비틀즈, 나오미 캠벨, 믹 재거, 데이비드 베컴의 초상사진도 걸렸다. 어둡고 작은 그림 하나도 놓쳐선 안 된다. 크림전쟁 중에 간호 활동을 펼치며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이었던 메리 시콜은 ‘블랙 나이팅게일’이라 불렸음에도 피부색 때문이었는지 나이팅게일 간호단 합류를 거절당했다. 사후 100년이 더 지나고서야 공로를 인정받고 역사의 재조명을 받은 시콜의 낡은 초상화가 2004년 한 벼룩시장에서 발견됐고, 미술관이 품에 안았다.

'블랙 나이팅게일'로 불리며 활약했으나 사후 역사적 조명을 받은 메리 시콜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블랙 나이팅게일'로 불리며 활약했으나 사후 역사적 조명을 받은 메리 시콜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의 5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영국 펑크 문화의 대모인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화장실 변기 옆에 서서, 반바지 위에 낡은 검정 스타킹을 덧입은 기이하고 장난스러운 초상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웨스트우드는 기후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티셔츠문구로 드러냈고, 표정은 자신감으로 넘친다. 그 당당함은 영국왕립예술가협회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화가 중 한 명이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루이스 조플링과 맞닿는다. 그의 경직됐지만 상당히 도전적인 표정은 뇌리에 깊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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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카츠의 화풍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알렉스 카츠의 화풍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주인공 못지않은 화가의 유명세가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경우도 많다. 영국 태생으로 1988년부터 패션지 ‘보그’ 편집장을 맡고 있는 애나 윈터의 초상그림으로 유명한 미국 화가 알렉스 카츠의 화풍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찰스1세의 가장 큰 신임을 받은 신하이자 당대 최고의 미술품 감식안으로 유명한 ‘제14대 애런들 백작 토머스 하워드’의 초상은 바로크미술 최고의 화가 피터 파울 루벤스의 작품이다. 그가 후원한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자화상도 전시됐다.

청동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빚은 동시대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두상을 비롯해 앤디 워홀이 그린 배우 조앤 콜린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계속 색깔이 바뀌는 LCD 스크린에 작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 등은 반가운 얼굴이다. 고가의 그림값으로도 유명한 루시언 프로이드의 ‘자화상’, 데이비드 호크니의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등에는 인물의 특징과 화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오귀스트 로댕이 빚은 동시대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두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오귀스트 로댕이 빚은 동시대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두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피터 파울 루벤스가 그린 백작 토마스 하워드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피터 파울 루벤스가 그린 백작 토마스 하워드의 초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데이비드 호크니의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데이비드 호크니의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폭풍의 언덕’ ‘제인에어’의 소설가 앤, 에밀리, 샬럿 브론테 자매를 단체로 그린 초상화는 집안 유일의 남자 형제 브란웰이 17세에 그린 것으로,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림이 샬럿의 남편이었던 니컬스 목사와 재혼한 부인의 집 찬장에서 접힌 채 발견됐다. 브론테 자매 셋을 그린 하나뿐인 그림이라 접혔던 자국마저 의미있게 읽힌다.

남동생이 그렸고 훗날 찬장에서 접힌 채 발견된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남동생이 그렸고 훗날 찬장에서 접힌 채 발견된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기술 발달로 사진이 일상화 한 지금도 왜 초상화의 전통은 계속되는 것일까? 양 학예사는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후 초상화 ‘에이미 블루’를 가리키며 “에이미의 음악을 추억한다면 이 초상화에서 그의 우울한 음색이 나지막히 들릴지도 모른다”면서 “쉽게 찍을 수 없어 쉽게 소비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한 사람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낸 진중한 초상화가 매력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초상화는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기에 낯설지만 공감하기 쉬우며 단순하지만 복잡한 의미를 가진 그림”이라고 평했다. 전시는 8월15일까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후 초상화 ‘에이미 블루’에서는 주인공의 우울한 음색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후 초상화 ‘에이미 블루’에서는 주인공의 우울한 음색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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