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부터 2년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일한 적이 있다. 나름 국제적인 의료의 질 전문가라 자부했는데 사고 체계가 흔들리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곤 했다. 10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전문가들과 국가 간 의료 성과를 비교하면서 한국 의료의 질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도 절감했다. WHO에서도 내 경험을 살려 회원국 의료의 질 평가를 위한 새로운 팀을 마련해줬다.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 국가 공무원과 전문가들 앞에서 의료의 질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급성심근경색증이나 암 사망률 같은 수치를 어떻게 산출하고, OECD 국가 국민들은 의료의 질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이는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분위기가 싸했다.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하고 라이베리아 참석자에게 그 나라의 당면 과제에 대해 물었다. 오랜 내전으로 병원에 전기와 물을 공급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는 말을 듣고서야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강의는 그렇게 망했다. 그 후 의료의 질과 성과 평가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시간을 보냈다.
WHO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보건 의료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력과 회복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해놨다. 하지만 내가 WHO에서 일하던 때만 해도 한국을 비롯한 고소득 국가들은 이 문제를 자기 일로 실감하진 않은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 코로나19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응력과 회복력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보건 의료 전문가들의 중요한 어젠다가 됐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중증 환자 수가 많아질 때 얼마나 빨리 대처할지, 위기를 겪은 의료 기관이 어떻게 다시 기능을 정상화할지, 병원이 코로나 환자로 여력이 없을 때 다른 중증 질환자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등이 한 나라의 보건 의료 대응력을 가늠하는 중요 요소들이다.
전 세계 전문가들은 대응력과 회복력의 중요한 중심축으로 보편적 의료보장을 꼽는다. 쉽게 말해 전 국민 건강보험이다. 팬데믹에 필사적으로 대처하는 와중에도 한국의 건강보험 체계는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이런 것들을 늘 지켜보며 대비한 기저에는 막강한 정보 인프라가 있다. OECD 회원국들이 코로나에 대처하는 우리의 사례를 공유하면서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 이유다.
물론 갈 길이 멀다. 보다 많은 정보를 원활하게 연계해야 한다. 클라우드나 빅데이터·인공지능(AI) 등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정보의 쓰임새를 늘려야 한다. 새로운 전염병이나 다른 재난적 보건 의료 위기 상황에 두루 대처할 수 있는 별도의 정보 체계도 갖춰야 한다. 데이터는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기민하게 사용할 수 있으려면 거버넌스부터 만들어야 한다.
모든 기회는 위기에서 비롯된다. 팬데믹 상황을 한국 보건 의료의 숙제를 풀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몫이다.
/여론독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