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라일락 향이 날리던 봄날 내 운명이 바뀌었다. 의과대학 본과 3학년 내과 병동 실습을 마치고 전공의 선배들과 회식을 하러 가던 길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를 괴롭혀온 복통이 다시 찾아왔다.
심한 통증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늘 익숙한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참았다. 의대생들에게 선배 전공의와의 회식은 선망의 자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급기야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아프면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위급 상황임을 깨달은 내과 의사들은 즉시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몇 시간 만에 담관낭종이라는 선천성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수년간 여러 차례 입원과 대수술을 반복해 겨우 건강을 되찾았다.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과 항암 치료라는 긴 터널이 또 시작됐다. 부모님께 나는 살아만 있어도 효도하는 자식이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결국 다시 건강을 되찾아 사회로 돌아왔다. 지난 2006년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일했다. 밥 먹듯 야근을 했고, 이웃집 드나들듯 전 세계로 출장을 다녔다. 1년 전부터는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기관장이나 마찬가지지만 4,000명 가까운 직원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단연 체력이다.
병을 극복한 의사인 나에게 주변에서 늘 묻는 것이 있다. 그런 악조건을 어떻게 견뎠느냐는 것과 어떤 병원에 다니느냐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가까운 의료 기관을 찾을 것’ 그리고 ‘의사 말을 잘 들을 것’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가까이 있는 동네 의원 선생님들이 더 폭넓게 진료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질병을 앓고 있는 복합 질환의 시대다. 세계보건기구(WH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초고령화 시대 1차 의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둘째, 가까운 병원이나 의원이어야 적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은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골든타임이 있는 급성 심근경색증이나 뇌졸중 같은 병은 가까이 있는 지역 병원을 찾아야 생명을 구할 확률이 높아진다. 암도 마찬가지다. 큰 수술이 끝나도 병원 갈 일이 많다. 멀리 있는 유명 병원보다 내 주변에 있는 지역 병원이 유리하다.
세 번째, 사회적 이유다. 위중한 환자들 가운데 대형 병원을 꼭 가야만 하는 분들이 있다. 수능일 모두가 고3 학생들에게 길을 내주듯, 더 중한 환자들에게 귀한 의료 자원을 양보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완성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역 병·의원의 질을 어떻게 믿느냐는 질문을 꼭 받곤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와 앱을 이용하라는 답으로 마무리한다.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모든 병·의원의 정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의료의 질을 평가하고 공개하고 있다. 스마트한 의료 이용은 가까운 병원과 의원 이용하기에 달려 있다.
/김성태 기자 k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