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하나·우리금융지주의 은행들이 암호화폐거래소와 사실상 실명 계좌 발급 등의 제휴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 세탁, 해킹 등에 따른 법적 책임 위험성이 수수료 수익, 계좌 확보 등의 이익보다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는 9월까지 실명 계좌 발급을 받아야 하는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무더기로 퇴출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하나·우리은행 등은 암호화폐거래소 등 관련 사업자 검증 작업에 사실상 참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부 의견을 모았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암호화폐거래소와의 계약은 자금 세탁 등의 이슈가 있어 거래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아직 제휴 문의가 들어온 곳도 없어서 계약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의 고위 관계자 역시 “해외 지점이 많고 글로벌 사업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자금 세탁 이슈는 한 번 발생하면 치명적”이라며 “나중에 금융 당국에서 (좀 더) 체계적인 지침이 나오면 (입장이) 바뀔 수 있지만 지금은 거래소와 거래하지 않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언급했다. 우리은행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이다.
현 특정금융거래정법에 따르면 암호화폐 관련 사업자들은 유예기간이 끝나는 9월 24일까지 은행으로부터 고객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입출금 계좌를 받고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만 영업이 가능하다. 은행은 암호화폐거래소로부터 실명 확인 입출금 계좌 발급 신청을 받으면 해당 거래소의 위험도, 안전성, 사업 모델 등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실시하고 이 결과를 토대로 실명 계좌 발급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국민·하나·우리은행들이 사실상 거래소에 계좌 발급을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이다.
은행권에서는 암호화폐에서 ‘사모펀드 사태’와 같은 일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암호화폐와 관련한 금융 사고가 발생할 경우 거래소에 계좌를 발급해준 은행에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국회에서 암호화폐에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점도 부담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은행과 제휴를 맺은 거래소에서도 실명 계좌 인증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는지 모르겠고 거래 과정에서 블록체인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내부에서 실제로 자금 세탁이 이뤄지고 있을지 알 수 없다”며 “가령 케이뱅크가 (거래소 관련 수수료로) 50억 원을 벌었다고 하지만 배 이상을 날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암호화폐거래소 ‘코빗’과 제휴를 맺고 실명 계좌를 발급해 운영 중인 신한금융지주 및 신한은행에서 말을 아끼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신한 측은 강도 높은 자금 세탁 위험 평가를 거쳐 발급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빗썸·코인원 두 거래소와 거래하고 있는 NH농협금융·농협은행은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편이다. 농협은 개별 거래소가 특금법을 준수한다면 고객 보호, 시장 영향력 등을 고려해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농협은행은 최근 빗썸에 자금 세탁 위험 평가에 필요한 서류를 보낼 것을 공식 요청했다. 업비트에 실명 계좌를 제공 중인 인터넷 은행 케이뱅크의 경우 고객 유입 등 시너지 효과를 고려해 제휴에 적극적인 상황이다.
/김지영 기자 jik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