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첨단 기술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대량살상무기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은 대다수의 국가들이 수출 허가제를 도입해 양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반면 음지에서는 산업스파이를 잡기 위해 민간의 손을 빌려 첩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반 시민이 경찰의 부탁을 받고 위법 행위를 저지른다면 죄가 될까.
경기도에서 반도체 무역업체를 운영하던 A씨는 2015년 무기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고성능 집적회로(IC)칩 15억여원 상당을 허가 없이 수출해 경찰 조사를 받았다. 현행법상 전략물자를 수출하려면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나 관계 행정기관의 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청 소속 B씨는 조사 과정에서 A씨에게 특별한 제안을 한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이 홍콩의 한 수입업자를 추적하고 있다며 수입업자에게 IC칩을 수출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B씨는 수출 시간을 단축을 위해 미국이 허가 절차 생략을 용인해줬다는 말도 한다.
이후 B씨와 함께 미국 수사관까지 만난 A씨는 2019년까지 총 71회에 걸쳐 25억여원 상당의 IC칩을 허가 없이 수출한다. 이 과정에서 A씨는 미국 수사관으로부터 ‘다른 누구와도 상의하지 말라’는 메일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B씨가 보직을 변경하며 발생했다. 아무런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떠나며 A씨가 수출을 이어가도 되는 지 상의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미국 수사관의 연락도 없었다. 고민 끝에 A씨는 수출을 이어갔고 결국 2020년 말 재판에 넘겨진다.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2월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형사3단독(김희석 판사)는 대외무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대한민국 경찰관이나 미국 국토안보수사국 수사관으로부터 다시 거래 중단을 요구받았다고 볼 자료가 없다”며 “미국 수사관의 수출 요청이라는 특수성과 비밀유지 요청 등을 고려할 때 스스로 판단해 수출 중단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찰과 미국 수사관의 요청을 신뢰한 것을 잘못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진지한 노력을 다하였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위법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편 해당 사건은 검찰이 지난 2월 항소해 같은 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한민구 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