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초만 해도 ‘재벌개혁’을 강조해 온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로 들어서면서 거대 기업 총수들에게 전향적인 협력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초에는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재벌의 정경유착 문제가 화두였다면, 이제는 코로나19 극복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총수의 역할이 부각되는 시대를 맞았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4대 그룹의 대미 투자가 백신·미사일·대북정책 등 광범위한 성과를 견인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문 대통령의 대기업 포용도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이와 함께 현재 국정농담 혐의로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에 대한 사면, 가석방 가능성에도 점차 힘이 실리고 있다. 남은 임기 동안 경제 성과로 정부의 성패를 갈라보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특히 민생 경제 회복 여부는 정권 재창출·교체 여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정부와 기업 간 협력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4대 그룹 총수 첫 靑 초청…기업 치켜세운 文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회장 등과 오찬 회동을 하며 한미정상회담 당시 4대 그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한미 양국 관계가 기존에도 아주 튼튼한 동맹 관계였지만 그 폭이 더 확장돼 반도체·배터리·전기자동차 등 최첨단 기술·제품의 공급망을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까지 포괄적으로 발전한 게 굉장히 뜻 깊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하이라이트는 공동 기자회견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지목해 일어서서 소개 받았던 일”이라며 “미국이 가장 필요한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주 뜻 깊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4대 그룹 대표만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 이날 간담회는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기업들과 함께 자축하기 위해 마련됐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미정상회담의 성과와 최근 코로나19 속 경제 반등을 이들 4대 그룹이 사실상 이끌었다며 적극 치켜세우는 발언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우리 경제가 코로나 위기로부터 빠르게 회복하고 재도약하는 데 있어 4대 그룹의 역할이 컸다”며 “지금까지 미국과 수혜적 관계였다면 이제는 반도체·배터리·전기차·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서 글로벌 공급망에 도움을 주는 동반자적 관계가 됐고 그 과정에서 4대 그룹의 기여가 컸다”고 평가했다. 이어 “탄소 중립 목표 역시 4대 그룹과 함께 가야 하고, 특히 RE100(재생에너지 전력 100% 충당),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앞장서줘서 감사하다”며 “기업의 앞서가는 결정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다”며 “정부도 역할을 했지만 기업도 큰 역할을 했다”고 4대 그룹의 노고를 치하했다.
문 대통령은 또 “대미 투자를 하게 되면 우리의 중소·중견기업과 협력 업체가 동반 진출을 하거나 수출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다”며 “반도체 등 신산업 분야의 인재 양성을 위해 정부가 노력하고 있지만 대학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므로 빠르게 인력 양성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나라는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와서 시스템 반도체 투자를 늘리고 수소차와 전기차의 연구·생산을 주도해왔고 배터리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왔다”며 “해운과 조선에 투자한 것도 이제 빛을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벌개혁’에서 ‘협력관계’로 전향적 방향 전환
문 대통령의 칭찬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저희들도 경제 관계가 더 활발해질 수 있도록 살피겠다”며 “한국의 투자가 적절한 시기에 이뤄져서 바이든 정부가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정부의 회복·포용·도약이라는 목표 달성에 함께하겠다”며 “탄소 중립은 후세대에 대한 현세대의 의무”라고 화답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와 미중 무역 갈등 등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가 다가왔는데 정부가 기업의 의견을 듣고 대처해줘서 감사하다”며 “이번 방미로 미국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호평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파운드리 공장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번 방미가 삼성의 대미 협력에 큰 힘이 됐다”며 “미국에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제2의 평택 공장 부지는 국내에서 찾기 때문에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래 방향에 대해 얘기를 나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기회를 자주 갖자는 공감대가 암묵적으로 있지 않았나 싶다”며 “문 대통령이 ‘정부가 갖고 있는 외국 정보와 기업만 수집할 수 있는 정보를 호혜적으로 공유하자’는 제안도 했다”고 전했다.
이날 문 대통령의 자세는 취임 초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일각에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문제가 화두가 된 데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우리 기업들의 위상을 확인한 뒤로 이들에 대한 문 대통령의 시각도 크게 바뀐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때부터 공약집에 ‘재벌 총수 일가 전횡 방지 및 소유·지배 구조 개선’ 등을 명시하는 등 대기업 총수들을 대체로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취임 직후인 지난 2017년 5월에는 김영배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 경총포럼에서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비판하자 이튿날 문 대통령이 직접 “경총도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경총을 향해 “책임감을 가지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 공감 많아”…‘이재용 사면론’도 한 발 더 나아가
이날 간담회에서는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관해서도 한 발 나아간 듯한 발언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 사면에 관해 “고충을 이해한다”며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밝혔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지금은 경제 상황이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고 기업의 대담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 사면 건의는 최 회장이 운을 떼면서 테이블에 올랐다. 최 회장은 “경제 5단체장이 건의한 것을 고려해달라”며 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한국무역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이 지난 4월 26일 청와대에 제출한 이 부회장 사면 건의서를 거론했다. 그러자 김 부회장도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기업 총수도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앞으로 2∼3년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관계와 재계에서는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두고 청와대가 이 부회장의 8.15 광복절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을 배제하지 않는 게 아니냐는 추정을 내놓았다.
청와대는 경제 5단체가 이 부회장 사면을 공식 건의한 직후인 지난 4월27일에만 해도 “이 부회장 사면 건의와 관련해서는 현재까지 검토한 바 없으며 현재로서는 검토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그러다가 지난달 10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나온 문 대통령 발언에 분위기는 다소 반전됐다. 문 대통령은 당시 “형평성, 과거의 선례, 국민 공감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 “지금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어 우리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더욱더 높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충분히 국민들의 많은 의견을 들어 판단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같은달 25일에는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이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경제계나 종교계, 외국인 투자 기업들로부터 사면 건의서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며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국민적인 정서라든지 공감대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별도 고려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별도 고려’에 대한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의 사면이 한층 가까워진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총리·장관도 연일 대기업 회동…차기 대선 ‘경제 성과’ 정조준
재계와의 스킨십은 문 대통령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4대 그룹 총수를 만난 바로 다음 날인 3일, 이번에는 김부겸 국무총리가 경제 5단체장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김 총리가 이 자리에서 “한미 정상회담 성과, 수출 등 한국 경제를 이끌어준 경제계에 감사를 표하고, 기업인들과 노동자, 함께하는 국민들이 모두 다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힘써 노력하겠다”고 포문을 열자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이 부회장 사면을 거론하며 “하루빨리 이 부회장이 현장에 복귀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우리 경제 단체들이 연명으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면 건의를 올린 바 있다”며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의 동태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우위가 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단체들은 △경제활력 제고 △신산업 기회 및 혁신 인프라 확대 △기업경영의 불확실성 최소화 △지속성장 기반 마련 △신산업 인력 확보 △규제 샌드박스 활성화 △수출 기업인 백신 접종 확대 △원자재가격 상승에 따른 중간 유통상 단속 강화 및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 △탄소중립·신산업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등을 정부에 요청했다.
4일에는 이호승 실장과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차(005380) 사장, 장동현 SK 사장, 권영수 LG 부회장, 이동우 롯데지주(004990) 사장 등 5대 그룹 사장단과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이 모임 역시 정부 측 요청으로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거대 기업에 잇따라 손을 내미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민생 경제 회복이 현 정부 평가의 최대 관건이 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차기 대선 정국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지표로 확연히 드러나는 경제 성과를 이끌 주체는 역시 대기업이라는 판단도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권 초보다 정권 말 민관 경제 협력이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의 기업 소통 행보는 사실 지난 3월31일 상공의 날 기념식에 취임 후 처음 참석하면서부터 본격화 조짐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당시 참모들에게 “기업인들을 활발히 만나 대화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또 4월1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모두 불러 모아 “최대한 투자와 고용을 확대해 주시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라며 ‘특별 요청’을 건넸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일에도 청와대에서 더불어민주당 초선 모임인 ‘더민초’ 소속 의원 68명을 만나 경제 회복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문 대통령은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하며 나아가 도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우리 정부는 퇴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미국도 첨단 산업 공급망에서 우리를 최고의 파트너로 생각할 정도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간 혁신성장 빅3(미래차,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를 육성해 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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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