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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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글쎄, 그렇게들 가셨더군요. 당신은 살짝 가고, 당신 친구는 슬쩍 가셨더군요. 나가는 길에 사알짝 중간 정산까지 바란 건 아니었죠. 스을쩍 맥주 한 병씩 돌리길 바란 것도 아니었죠. 노래방까지 함께 갈 사이도 아니었죠. 남은 ‘쟤들’끼리 한 잔 더 했죠. 당신네는 스리슬쩍 갔지만, 우리는 끈적끈적 남았죠. 끝까지 어깨동무하며 새벽길 걷어찼죠. 술값을 서로 내겠다며 드잡이하고, 택시를 먼저 타라고 실랑이했죠. 당신도 살짝 갈 수 없는 ‘우리’가 있을 거예요. 살짝 가도 외롭고, 나중 가도 외로울 거예요. 함께 자리를 그리고 있는 별들도 광년의 외로움으로 빛난다죠.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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