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양대산맥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 광주 민주화항쟁과 87년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우리나라는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그 과정의 고비고비마다 김영삼이 서있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지난6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변혁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문민정부를 이끌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사(史)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람”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사회·정치에 큰 변화를 몰고오는 리더십이다. 수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거래적 리더십’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김 교수는 “정치 지도자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집권 초기에 변혁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 문민정부는 취임 초기 90%가 넘는 지지율을 바탕으로 개혁 과제를 수행해 ‘신(新)한국’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고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십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은 동의하면서도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이날 저녁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과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서울 여의도 카페 하우스(How’s)에서 열린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 세미나에서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강연에는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도 참석했다.
승부사적 성취형 리더…민주화의 거산(巨山)이 되다
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을 ‘승부사적 성취형’ 리더라고 분석했다. 정치상황을 읽는데 명수였고, 직관이 뛰어났고, 결단력과 용기를 갖췄다는 점에서다. 김 교수는 “그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페이지마다 존재감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거산(巨山) 김영삼이 이름 그대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큰 산이 된 셈이다.
김 교수는 “최근 36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이 화제가 됐는데 YS는 26세에 3대 국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며 “최연소 기록이다. 아마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그 젊은 정치인이 1년만에 탈당하고 ‘헌정동지회’에 들어갔다”며 “거기서 민주당이 결성됐다. 당시로선 굉장한 결단이었다”고 부연했다. 그는 “흔히 70년대 40대 기수론을 DJ의 브랜드로 아는데 사실 YS가 이끌고 간 아젠다”라며 “1973년에는 결국 신민당 당수로 김 전 대통령이 뽑혔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시작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당수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뉴욕 타임즈’를 통해 “미국은 군부 독재를 지지할 지 한국 국민을 지지할 지 선택하라”며 미국 카터 행정부를 압박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YS가 제명되고 이것이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김 교수는 “80년대의 경우 YS는 23일 단식 투쟁으로 5개 민주화 조치를 약속 받아냈다. 1984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신한국당의 초석을 다졌다”며 “이처럼 김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 흐름을 만들어 온 과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선명한 국정철학…문민정부로 신한국 창조
김 교수는 “대통령 취임사는 그 시대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한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를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 부정부패 척결과 경제 회생, 국가 기강확립이 세부 과제였다.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과거 기득권층을 대대적으로 사정했다. 선거에서 협력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경제 회생을 위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단행했다. 기강 확립을 위해 TK 엘리트 중심이던 하나회를 척결했다. 당시 사령관급은 100%, 군단장의 60%, 사단장의 40%가 교체돼 군벌은 거의 전멸하게 됐다. 김 교수는 “이 모두 YS가 아니었으면 못 했다는 진단이 일반적”이라며 “특히 하나회 척결의 경우 영남 대통령이 지시했기에 척결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청 철거로 상징되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김 교수는“생전에 여쭤봤더니 국회의원 시절부터 일본 학생들이 수학여행 와서 중앙청을 보고 자기네들 문화유산이라 하는 것을 듣고 청산해야 겠다 다짐했다더라”고 전하며 “김 전 대통령 본인이 확고한 역사의식이 있어서 진행된 일”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 본인의 철학과 역사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강행됐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이 경우 단순히 대통령의 철학과 이념이 확고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것이 민심과 부합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문민정부는 정부가 지배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수직적 관리구조”였다며 대통령 비서실이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는 집중형 체제였음을 김 전 대통령의 한계로 짚었다. 그는 “이후 개혁 대통령-안정 총리 모델이 일반화 됐다”며 “당시에는 YS가 민주화 투쟁을 하느라 국정 운영 경험이 적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안정형 대통령-개혁형 총리 모델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정책 수행 과정에서 여론을 수렴하고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해 잘못됐으면 신속하게 수정하는 기동성이 있었다”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하지만 정책 수행 과정에서 객관적인 분석과 검토 없이 대통령의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