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모든 대학이 하버드나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연구에 중심을 둔 대학뿐 아니라 교육에 특화된 좋은 대학도 나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4년제 대학들이 연구 중심을 지향하다 보니 교육 자원이 분산돼 교수들이 수업을 열 때도 한계가 많은 상황입니다. 한 교수가 1년에 가르쳐야 하는 강의 시수가 여섯 개인 것과 ‘단 한 과목만 가르치되 열과 성을 다해서 하라’는 것과는 사실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윤성로(48·사진)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4차위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SW)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낼 수 있는 ‘교육 중심 대학’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최고의 공대로 꼽히는 하비머드칼리지(Harvey Mudd College) 등 학부 교육에 특화된 대학들이 많지만 국내 4년제 대학의 대부분은 연구에만 무게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AI·SW·데이터 등 미래 산업 분야는 전체 개발의 큰 그림을 그리고 개발자들을 이끌 수 있는 ‘톱클래스 개발자’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교육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며 “대학 내에서도 각 학과의 명운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결단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대담=김민형 바이오IT부장 kmh204@sedaily.com
윤 위원장이 지난해 2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장에 취임한 뒤 수백 번의 회의와 미팅에서 산업계 인사들과 만날 때마다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스타트업을 막론하고 기업들은 모두 인재 부족을 호소했다. 그는 4차위의 수장인 동시에 2012년부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에서 AI·소프트웨어 인재를 키우고 있는 교육자다. AI 권위자로 성장하기까지 한국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모두 겪어보기도 했다.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개발자 인력난을 호소하지만 개발자 수십만 명을 양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고 수준의 핵심 인재 양성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내에 코딩을 할 수 있는 개발자는 많지만 소프트웨어 시스템 설계도를 그리고 통합적·분석적으로 사고해 개발자들을 이끌 수 있는 핵심 인재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진단이다. 윤 위원장은 “개발자 붐이라고 할 정도로 개발자는 많은데 소위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라고 하는 톱 레벨의 엔지니어 숫자는 굉장히 적다”며 “짧은 시간에 많이 육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전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는 소프트웨어 전반을 개발할 수 있는 일종의 설계자다. 소프트웨어 규모에 따라 개발 복잡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훌륭한 아키텍트가 SW를 설계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업데이트를 할수록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커진다. 통상 SW 아키텍트들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친 후 기업 등에서 일정 기간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탄생한다.
윤 위원장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에서 공부했다. 스탠퍼드에서의 경험은 충격이었다. “컴퓨터 전공 수업을 들으면 아주 쉬운 단계부터 시작하지만 교육 과정이 치밀하게 설계돼 있어 모든 과정을 듣고 나면 아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게 학생들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학생들에게 ‘떠 먹여주는 수업’이었지요. 스탠퍼드는 연구 중심 대학이었지만 조교 7명이 학생 한 명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지도합니다. 학생이 소화하기에 따라 최대 7명의 조교를 만나 상담을 받거나 일대일 과외처럼 궁금한 부분을 물어볼 수 있는 것이지요. 교수 한 명이 학생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조교도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학생이 수업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윤 위원장은 국내 대학이 AI·데이터·클라우드 등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려면 대학 내 학과 정원 조정 등 산업 트렌드에 맞춰 보다 신속하게 체질과 커리큘럼을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우수한 개발 인력을 구하기 위해 대학 등에 파격적인 지원을 해도 막상 학과 정원과 커리큘럼 등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윤 위원장은 “금융회사들이 시장 상황에 따라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절하는 ‘리밸런싱(재조정)’처럼 교육 포트폴리오에 변화를 줘야 한다”며 “지금처럼 10~20년에 한 번도 리밸런싱을 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트렌드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학과별 교수 및 학생 정원, 수업 시수 등 다양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고 덧붙였다.
4차위의 올 하반기 주요 과제 중 하나는 AI 대중화다. AI가 특정 기업이나 계층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되도록 하는 게 목표다. 윤 위원장은 “계산기를 누구나 쓰는 것처럼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연구자든 자신의 일을 위해 AI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선은 AI라는 도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실 최근 기업·가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관련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업무에는 AI가 빠르게 적용되고 있다. 당연히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 나온다. 윤 위원장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라며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 등 하드웨어가 준비되고 있기 때문에 고령화로 노동 인력이 부족한 시기에 AI가 이를 대체하는 타이밍이 어느 정도 맞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다만 “AI나 로봇 도입은 위험하거나 사람이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일 등 일자리 영향이 작은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더 편해지고 잘살기 위한 도구로 AI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의사들처럼 진단할 수 있도록 개발된 IBM 왓슨의 경우 의사들만 할 수 있는 가장 고등한 영역인 ‘진단’을 하려다 보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의료 분야에서도 사람이 일일이 관절을 찍어 관절 나이를 더해야 하는 ‘뼈 나이 측정’ 같은 경우는 단순하지만 사람의 노동력을 크게 덜어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도입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정한 패턴이 있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은 AI가 담당하고 사람은 새롭게 확보하는 시간 동안 생산성을 올리거나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AI 경쟁력은 어떨까. 최근 네이버·KT(030200)·LG전자(066570) 등 대기업들이 앞다퉈 초거대 AI 에 투자하고 있지만 해외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윤 위원장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초거대 AI 분야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앞서나가고 있고 영국·캐나다·이스라엘·한국이 그 다음으로 보인다"며 “최근 기업들이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분명히 평가할 만하며 AI 기술은 결국 반도체화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보유한 한국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4차위의 올 하반기 또 다른 역점 사업은 데이터 산업 활성화다. 4차위는 지난해 8월 데이터3법 시행령 개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민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정부에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로 인해 2월 범국가 데이터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확대할 수 있었다. 데이터와 AI 간 결합을 통한 산업 활성화의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올해는 가명정보 결합과 마이데이터 사업 등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금융 분야뿐 아니라 의료·통신 등 전 산업에 걸쳐 데이터 이동 기반의 마이데이터를 확산하기로 한 만큼 세계적으로도 가장 범위가 크고 선도적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제언에 그치지 않고 11대 과제와 9개 서비스로 이뤄진 독자적인 프로젝트인 ‘데이터119’를 내놓은 것도 이 같은 자신감의 일환이다. 윤 위원장은 “마이데이터에서 금융 분야가 가장 앞서 있고 의료가 천천히 가고 있는데 이를 전방위로 확산하는 것이 중요 과제”라며 “마이데이터 확산을 목표로 구체적인 실행 과제로 데이터119 프로젝트의 속도를 내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