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게 이기는 거다.” 아버님이 생전에 자주 한 말씀이다. 중학교 때부터 처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와 싸우고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물어보는 나에게 아버님은 “그냥 져라. 그게 속 편하고 좋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님이 싫었다.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같이 보복해줄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지라고만 하는 아버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 보면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자연히 궁금해지는 것은 “지는 것이 정말 이기는 것인가”와 함께 그 말뜻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달리기 시합을 하면 그냥 진다. 일부러 빨리 뛰지 않는 것이다. 속으로는 ‘사실 내가 진짜 속력을 냈으면 넌 이길 수 있었어’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내가 전력을 다해 뛰어도 지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지고 난 후 속으로 ‘사실은 내가 이긴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얄미운 일이 아닐까. 루쉰의 아큐정전에 나오는 정신 승리인가.
어린 나이에 아버님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자 그 부작용은 여러 갈래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첫째,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죽자 살자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 한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냥 대충대충 한다.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일 치고 죽어라 하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혼자 이 정도면 죽어라 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야 겨우 된다. 그래도 운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세상일이다. 둘째, 교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져놓고 속으로 그것을 승복하지 않는 것은 사실 자신이 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단히 건전하지 못한 태도다.
한국에서는 학생들끼리 시합을 하고 난 뒤에 이긴 학생더러 진 학생에게 위로의 말을 먼저 전하라고 선생님이 권한다. 미국에서는 진 학생더러 이긴 학생에게 축하의 멘트를 먼저 하라고 권한다. 왜? 패자가 승복할 때까지 그 시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까.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가 진정으로 감동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늘 불평하는 자세가 몸에 밴다. 져놓고도 억지로 졌다고 생각하니 맘이 편할 리 있겠는가. 계속 툴툴거리는 수밖에. 패인을 내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원망을 돌리는 것이다. “아, 그때 그 인간이랑 잘못 어울리는 바람에 이 모양이 돼버렸어” “그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어” “조금만 운이 따라 줬더라면” 매사 이런 식이니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비쳤겠는가. 패배의 원인이 자신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발전할 기회를 놓치는 중인지도 모른다.
모든 경쟁에서 다 이기려다 보면 무리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백전백승은 위험하다. 왜 그럴까. 혼자 독식하겠다는 탐욕을 부리는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적으로 변하고 만다. 약자들은 똘똘 뭉쳐 자신들을 올려세울 수는 없어도, 강자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쉽게 해낸다. 그리고 다음 희생양을 찾는다. 아무도 튀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래서는 지는 사람도 지고 이기는 사람도 지는 것이다. 다 지는 것이다.
한 부부가 있었다. 허구한 날 두 사람은 싸운다. 싸웠다 하면 부인이 판판이 이긴다. 그 광경을 쭉 지켜보던 아들이 하루는 아버지에게 면담 신청을 한다. “아빠, 엄마랑 왜 싸워요. 맨날 지면서.” “잘 보면, 내가 항상 지는 것은 아니다. 엄마랑 싸우면서 중요한 싸움에서는 절대 안 진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만 내가 져주지.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니 세상에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더구나.” 여기서 누가 이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절대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