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의 미래였고, 내일을 만들어낼 과거이기도 하다. 시간의 점들이 촘촘히 찍히고 그 선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흐름이 되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역사’가 탄생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펼쳐지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은 문화재부터 근현대 미술품, 각종 문헌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한 240여 점의 작품이 모여 한국 미술의 수백 년 역사를 연결한 전시다. 이 특별한 조우는 ‘한국의 미(美)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130여 점의 근현대 미술품 중에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4점도 포함됐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각 작품을 연대기 순이 아닌, 시대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는 데 있다. 네 가지 키워드인 ‘성(聖·종교적 성스러움과 숭고함의 가치)’, ‘아(雅·맑고 바르며 우아한 격조)’, ‘속(俗·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중적 취향)‘, ‘화(和·우호적 융합과 조화)’로 분류된 전시 공간은 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소재와 주제를 중심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속(俗) 섹션에 걸린 시대별 여성의 초상화는 미술 속에 나타난 시대의 변화, 사고의 변천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초승달 눈썹에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 여기에 연미색 저고리와 풍성한 옥색 치마까지. 한 손으로 옷고름 쥔 고운 자태는 전통적인 한국의 미인상이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혜원 신윤복의 걸작 ‘미인도’(전시에선 복제본 사용)의 건너편에는 담담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문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이다. 유교적 분위기의 조선 시대에는 미인도가 속화(俗畵)로 평가절하됐으나 1960년대 이후 생성된 한국미 담론에서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김홍도의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우수한 전통으로 여겨지며 현대 작가들에게 자극을 줬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천경자의 이 작품이다. 니코틴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안정에 든 순간을 담담하게 묘사한 자화상적 성격의 이 작품은 여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그림에 담아냈다. 함께 걸린 장운상의 ‘청향’(1973), 장우성의 ‘단군일백이십대손’(2000)까지 어우러져 시대에 따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미술에 반영돼 왔는지 보여준다.
아(雅) 섹션에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인 ‘금강산도’(조선 17세기)와 이철량의 ‘도시 새벽’(1986)이 나란히 걸렸다. 조선 후기를 풍미한 진경산수화는 20세기 회화에서도 끊임없는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했는데, 1980년대 수묵화 운동의 범주에 있었던 화가들은 ‘진경’을 내세워 도시 풍경화를 활발하게 그렸다. 이철량 역시 수묵화 운동의 일원으로 ‘도시 새벽’에서 아파트를 마치 금강산 1만 2,000봉처럼 묘사해 진경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옆으로는 정선의 ‘박연폭’(18세기)과 윤형근의 ‘청다색’(1975~1976)이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데, 이 같은 배치 덕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정선과 진경이 지닌 의미, 전통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전시 공간에는 조덕현이 이번 전시를 기념해 연필로 담아낸 세로 350㎝, 가로 830㎝의 대형 그림 ‘오마주 2021-Ⅱ’가 기다리고 있다. 화폭을 가득 메운 약 100년 전 한국인들의 얼굴 중에는 김재원, 오세창, 고유섭, 최순우, 나혜석, 윤이상, 백남준 등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약 1,000장의 사진 중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인물들을 성비(性比)까지 고려해 선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이들 전부가 모인 듯한 구도를 완성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이건희 컬렉션 4점을 서울에서 최초로 공개한 자리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컬렉션에 속한 작품은 도상봉의 정물화인 ‘포도, 항아리가 있는 정물’(1970), ‘정물 A’(1974)와 이중섭 1950년대 은지화, 박영선의 유화인 ‘소와 소녀’(1956)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