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가 지난달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기존의 연 2.5%에서 2.3%로 낮췄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가 성장에 압력을 주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다. 총 82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6.4%에 달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오는 2025년 초고령 사회(고령 인구 비중 20%) 진입이 유력하다. 피치는 “고령화 지출 압력이 높은 상황에서 국가 채무 증가는 재정 운용상 위험 요인”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위기 극복을 빌미로 혈세를 펑펑 쓰면서 부동산 세금 폭탄으로 세수를 충당하려 하고 있다. 반면 기금 고갈 시간이 다가오는 국민연금 등 연금 개혁에는 소극적이다.
조세·복지 전문가인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일 서울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해서는 세제 개혁과 국민연금 등 4대 보험 개혁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대통령 직속 세제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과감한 결단을 통해 현재까지 유지되는 연금 체계를 만든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처럼 지도자가 연금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종합적 처방 없이 세금만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돈키호테식 발상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 경제 상황을 진단한다면.
△‘한강의 기적’이 ‘한강의 눈물’로 급전직하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 있는데 낮은 성장률이 만병의 근원이다. 고용 불안과 빈곤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저성장의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정부’를 내세웠지만 4년 동안 실업난을 심화시키고 경제도 연평균 1.8%밖에 성장시키지 못했다.
-최근 저성장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재인 정부가 쏟아낸 온갖 반(反)시장적 정책이 경제의 활력을 죽였다.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는 활기가 넘쳐야 할 기업이 탈진한 상태이고 정부가 ‘만용의 칼’을 휘두르는 데서 야기되고 있다. 정부가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하기는커녕 문제의 원인 제공자가 됐다.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정책 책임자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점은 아무리 정책을 잘못 집행하더라도 우리 경제가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 계속 성장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대로 가면 4만 달러로의 진군이 아니라 2만 달러로의 후퇴가 걱정된다.
-저성장을 극복하려면 어떤 처방이 필요한가.
△성장이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가 돼야 한다. 지난 수년간 투자 절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자가 계속 부진해 성장의 기반이 통째로 내려앉고 있다. 성장을 촉진시킬 방안의 요체는 국내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해외로 나간 우리 기업 중 10%만 돌아와도 실업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또 포춘 500대 기업들이 앞다퉈 한국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경제가 5년 이상, 연 5%씩 성장하면 실업·빈곤 등의 근원적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다.
-현재 잠재성장률이 2% 수준에 불과한데 5%가량의 성장이 가능할까.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시절 우리 경제가 연평균 7~9% 성장한 것은 당시 잠재성장률이 높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역사상 번창한 국가들에서 국내 정치·사회의 안정, 과감한 외자 유치, 신산업 적극 투자, 국민 통합 등이 높은 성장의 원천이었다. 설비투자 활성화와 외국 자본·기술의 국내 유입은 나라 전체의 경제 특구화가 되면 가능하다. 잘나가는 나라는 그 나라 전체가 경제 특구인데 우리는 몇몇 지역에 특구를 만들어놓고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보통구’와 다름이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 활력 살리기보다 재정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 재정의 가장 큰 문제는 예산 낭비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나랏빚까지 내는 예산 낭비는 죄악이고 향후 우리 사회에 재앙을 초래한다. 지금 정부는 ‘재정이 만능’이라는 재정 중독증에 빠져 있다. 황당한 명분을 내세워 선심성 예산 퍼주기에 골몰하고 있다. 복지 정책을 넘어 예산을 마구 살포하면서 국민 세금을 공공연히 낭비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일자리를 파괴하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한다며 국민 세금을 투입하는 등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모순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로 재정을 마구 쓰고 있다. 공직자의 예산 낭비가 국가를 망하게 하는,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정부가 예산을 방만하게 쓰고 민간 부문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정부가 재정을 함부로 쓰면 늘어날 복지 수요 등을 감당하기 힘들 텐데.
△지금은 세출 규모를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세출 내역을 전반적으로 다시 조정해야 할 시점이다. 예산 낭비를 줄이고 늘어난 세수를 활용해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재정지출을 통한 퍼주기에만 전념했지 전대미문으로 불어난 지출을 감당할 재원 조달 방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수를 늘려야 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증대하는 복지 수요는 물론 통일에 대비해 조세부담률(국내총생산(GDP) 대비 조세 총액 비율)을 현재의 20%에서 25% 정도로 높일 필요가 있다. 국민부담률(GDP 대비 세금과 사회보장성 기금을 합한 금액 비율)도 현행 27%에서 30%로 올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서는 세제 개혁과 국민연금을 포함한 4대 보험의 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세제 개혁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행 누더기 세제는 우리 몸에 맞지 않다. 납세자, 정당, 관료, 이익 단체 모두가 각자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있는데 국가 전체를 위한 객관적 관점에서 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해야 한다. 현행 기획재정부 소속 세제발전심의회보다 격상해 대통령 직속으로 세제개혁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세제개혁위에 장기적 활동 기간을 부여하고 독립성을 보장하는 게 중요하다. 전면적 세제 개혁을 반드시 해야 할 때가 됐다.
-국민연금 등 4대 보험 개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정책적 변수로는 가입 연령, 수급 연령, 연금보험료 수준, 소득대체율(은퇴 전 평균 소득 대비 은퇴 후 연금액 비율) 등이 있다. 사회·경제적 변수는 출산율, 기대 수명, 경제성장률 등이다. 정책적 변수와 사회·경제적 변수를 잘 조합하면 연금 고갈을 막고 연금 제도를 지속시킬 수 있다. 문제는 연금 가입자들이 보험료를 적게 내면서 수급 연령을 낮추고 높은 소득대체율을 요구하는 데 있다. 이런 ‘저부담 고혜택’ 구조로는 제도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보험료율(보험 가입 금액 대비 보험료 비율) 평균이 우리의 두 배를 넘는 19%에 달한다. 현재 9%인 보험료율을 매년 0.5%포인트씩 인상해 15%까지 올리도록 국민적 합의를 조속히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들을 설득하고 결단할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 이상 문제를 미루거나 회피할 시간이 없다. 국민연금 제도 최초 도입자는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다. 당시 독일인의 평균수명이 50세가 안 됐는데 비스마르크가 앞장서서 연금 지급 연령을 70세로 대폭 높여 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했다.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세금으로 해결하려 하면서 세제가 누더기가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때마다 정책 당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것이 세무조사와 세 부담 강화다. 세제 및 세정과 관련해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우선 세무조사 방향이 틀렸다. 투기에 대한 세무조사가 아니고 탈세 세무조사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둘째, 조세 원리상 양도소득세 강화는 잘못된 정책이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이전에 세 부담이 낮아야 활발하게 유통돼 경제활동이 촉진된다. 양도세 강화는 동결 효과를 초래해 원활한 거래를 저해하고 가격 급등 요인을 내재화할 뿐이다. 셋째, 부동산 세금의 급격한 인상이다.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매년 50%를 넘는 세 부담 증대가 여러 해에 걸쳐 징벌적으로 가해지는 것은 세제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현 정부 부동산 정책의 근본 문제는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보면 무책임과 태만, 무지와 몰상식의 극치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여건을 시간을 두고 조성해가는 노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조령모개·임기응변 정책만 남발했다. 부처 간에 손발을 맞추지 않았고 문제 해결이 아닌 회피에 급급해왔다. 과거의 정책 실패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다.
He is…
1947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 메릴랜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조세학회 회장과 한국재정학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조세연구원 원장, 국회 초대 예산정책처장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박근혜 정부 때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