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IPO) 대어 크래프톤이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 들면서 ‘공모주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준금리 인상이 예고된 가운데 증시 활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고평가된 기업을 투자 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다. 연말까지 상장이 예고된 대어들도 몸값 책정에 신중을 기할 것으로 보인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크래프톤 이후 연말까지 주요 기업들은 IPO를 통해 14조 원 이상의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다.
규모가 가장 큰 곳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기업가치는 최소 50조 원, 공모 규모만 10조 원대로 분석된다. 오는 10월께 상장이 예고됐다. 카카오페이는 9월 중 상장에 나선다. 기업가치는 12조 원으로 1조 원은 조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엔지니어링(1조 원), 현대중공업(1조 원), 롯데렌탈(8,509억 원) 등 대기업 외에도 원티드랩·아주스틸·플래티어·한컴라이프·딥노이드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강소 기업들 역시 출사표를 던졌다.
업계에서는 크래프톤 이후 공모주 투자 심리가 이어질지 주목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증권사 3곳의 중복 청약이 가능했지만 증거금이 5조 원 선에 그치면서 흥행 실패로 평가 받는다. 중복 청약이 가능했던 SK아이이테크놀로지(80조 9,000억 원)나 SK바이오사이언스(63조 6,000억 원), 중복 청약이 막힌 카카오뱅크(58조 3,000억 원)에도 한참 못 미친다.
물론 공모주 투자 심리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인공지능(AI) 기반 채용 플랫폼 원티드랩이 대표적이다. 256억 원 공모에 5조 5,291억 원이 몰렸다. 공모가는 3만 5,000원으로 기업가치는 1,646억 원이었다. 기업가치만 적절히 평가 받는다면 투자처를 찾는 부동자금은 얼마든지 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크래프톤은 고평가 공모가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배틀그라운드’라는 단일 게임에 기반, 세계적 성공 가능성 보여줬지만 공모가 49만 8,000원(기업가치 24조 원)은 리니지로 대표되는 엔씨소프트 시가총액(17조 원)보다 높았다. 기업가치 평가 과정에서 비교 대상에 월트디즈니·워너뮤직그룹 등 글로벌 콘텐츠 업체 2곳을 넣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금융감독원의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로 공모가를 낮춘 것도 악재였다.
공모가 논란에도 상장한 종목들의 주가가 순항할지 여부도 앞으로 대어들의 공모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카카오뱅크가 대표적이다. 공모는 성공적으로 완료했지만 다른 금융주들과 비슷한 주가 수준이 유지될지 관심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크래프톤은 일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카카오뱅크는 누구나 아는 종목”이라며 “상장 이후 주가가 곤두박질친다면 공모주 투심이 급랭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근본적으로 공모가 산정 방식에 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기관투자가 수요예측→공모가 확정→개인 청약’ 순이다. 반면 일본·대만·홍콩은 기관투자가 대상 수요예측 및 개인 투자자 공모 청약 절차를 마친 뒤 공모가를 확정한다. 기관투자가가 공모 주식의 70% 가까이를 책임지고 있지만 개인 투심 역시 시장 분위기를 짚을 수 있는 지표라는 지적이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0년간의 데이터를 보면 개인 투자자의 청약률이 200 대 1 이하인 경우 공모가 고평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며 “기관 경쟁률뿐 아니라 개인 청약률 정보까지 활용하면 공모가 고평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