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시대적 욕망 따라…여신의 얼굴은 바뀌었다

[책꽂이-여신의 역사]

베터니 휴즈 지음, 미래의창 펴냄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무수한 남녀 신이 등장하지만, ‘사랑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만큼 오늘날에도 꾸준히 언급되는 존재는 드물다. 비너스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류 역사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방송인 베터니 휴즈 킹스칼리지 런던 연구원은 비너스의 역사를 고찰한 신간 ‘여신의 역사’에서 “여신의 역사는 인간 욕망의 역사”라고 말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비너스는 “사랑의 쾌락의 화신일 뿐 아니라 공포와 고통의 화신이며 욕망이 빚어내는 황홀경과 극도의 고뇌를 상징하는 신”이요, “인간의 특성에서 비롯된 복잡한 일의 총체이자 좋든 나쁘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충동의 총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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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저자가 수십 년 동안 여신의 자취를 따라 그리스 신전, 중동의 발굴터, 폼페이의 가정집 등 수많은 유적지를 직접 찾아 다니며 조사한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비너스는 중동과 지중해 연안에서 탄생했으며, 문명마다 호칭은 달랐지만 상징하는 의미는 같았다. 동서양 간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면서 여신의 흔적은 그리스로 넘어갔고, 중동의 여신과 그리스의 토착 여신을 혼합한 아프로디테가 만들어졌다. 아프로디테를 숭배한 문화는 이후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로 넘어가 비너스로 이어졌다.

비너스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애의 힘부터 전쟁과 죽음, 파괴까지 주관했다. 저자는 그리스의 아프로디테는 남녀의 육체·문화·감정적 교류를 권장함으로써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시민 공동체의 화합을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로마 시대의 비너스는 사상과 정치의 핵심이었다. 로마인들은 비너스가 표상한 군사력, 전쟁 충동을 통해 세계 정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주체적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던 비너스의 존재는 르네상스 이후 남성들의 시선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는 상징으로 대상화된다. 대중에 익숙한 벌거벗은 비너스의 형상이 재주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로서 살아남은 비너스는 근대 들어 대중의 오락을 위한 욕망과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성차별·인종차별을 얄팍하게 가리는 도구가 됐다. 다행히 현대에는 비너스가 여성 섹슈얼리티의 힘과 잠재력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1970년대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 당시 비너스를 상징하는 점성술 기호에 주먹을 그려 넣은 피켓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만7,000원.


박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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