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뭇과 갈잎큰키나무인 고욤나무는 잊힌 나무지만 귀한 존재이다. 지난 1970년대만 하더라도 농촌에 고욤나무가 꽤 흔했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고욤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작은 열매이다. 사람들은 감나무를 접붙일 때 고욤나무를 대목(代木)으로 사용할 뿐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고욤나무의 학명(Diospyros lotus L) 중 속명은 감나무의 학명(Diospyros kaki Thunb)과 같다. 고욤나무와 감나무의 속명 디오스피로스(Diospyros)는 ‘신’을 의미하는 ‘디오스(Dios)’와 ‘곡물’을 의미하는 ‘피로스(Pyros)’의 합성어이다. 열매는 아주 달다. 실제로 검게 익은 고욤나무의 열매는 감나무 열매보다 훨씬 달다. 고욤나무의 열매를 흑조(黑棗) 혹은 오조(烏棗)로 부르는 것도 열매가 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단지 작다는 이유로 온갖 설움을 당해야 했다.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고욤나무에 대한 최대의 모욕일지도 모른다. 고욤나무는 한자로 작은 감나무를 의미하는 ‘소시’, 대추나무를 의미하는 ‘양조(羊棗)’로 불린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고욤을 농익은 배를 의미하는 ‘농리’에 비유했다. 이처럼 고욤나무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다른 존재에 비유당하는 굴욕의 삶을 살고 있다. 고욤나무의 종소명 ‘로투스(lotus)’는 ‘연꽃’ 혹은 열매를 먹으면 황홀경에 빠져 근심을 잊는다는 뜻도 있다.
천연기념물 제554호인 강릉 현내리 고욤나무는 그 자체로 고욤나무에 대한 폄하를 씻어버릴 만큼 대단한 존재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18호인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와 더불어 국내에 두 그루밖에 없는 문화재이다. 두 그루 모두 250세다. 경남 의령군에 살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천연기념물 감나무 나이(500세)의 절반이다.
처음 만난 강릉의 고욤나무 천연기념물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열매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고욤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성황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욤나무 옆에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황당은 토지와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을 모시는 곳이다. 고욤나무는 강릉시 현내리와 이 마을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이다. 나무 앞의 깃 달린 대나무는 이곳 사람들이 아직도 고욤나무를 숭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고욤나무 가지는 전봇대와 닿아 있다. 전봇대는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는 데 아주 중요하지만 고욤나무 생장에는 좋지 않다. 20m 높이의 고욤나무가 수명대로 살려면 생장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게다가 혹시 벼락을 맞아 가지가 부러지거나 쓰러질 것에 대비해 피뢰침을 설치할 필요도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 은행나무와 경북 예천군 황목근 등에서 보듯이 전국의 천연기념물 나무 중에는 피뢰침을 설치한 예가 적지 않다.
현내리 고욤나무는 밑둥에서 줄기 두 개가 나란히 자란 모습이지만 북동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남쪽 방향의 뿌리가 아주 굵다. 이는 나무가 스스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전략이다. 뿌리 주변에 여러 개의 큰 버섯이 있다. 버섯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균이 생겼다는 뜻이니 고욤나무를 위해서는 제거해야 한다. 성황당 앞 한 그루 사철나무는 고욤나무를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의 변치 않는 사랑이다. 사철나무가 꽤 큰 것을 보면 고욤나무를 향한 사랑이 일찍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앞 도로에는 이동 차량이 꽤 있어 고욤나무의 삶에 적지 않은 고통을 주지만 주변의 대파가 공해에 힘들어하는 고욤나무에 위안을 줄지도 모른다. 대파를 가꾸는 주인이 왕래하면서 고욤나무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새 기분이 좋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욤나무 동쪽 가지의 그늘에 살고 있는 참깨의 향기는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욤나무 줄기의 검은 색과 정사각형의 껍질 모양은 한 존재의 연륜이자 지혜의 보석이다. 고욤나무의 이러한 모습은 시간을 축적하면서 쌓은 고통의 산물이지만 고통은 지혜를 낳는 어머니이다. 마치 퍼즐을 맞춘 것 같은 조각 하나하나는 고욤나무의 이력이다. 빈틈없는 조각들은 고욤나무가 얼마나 정성껏 살았는지를 증명한다. 한순간도 쉼 없이 살아가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정신을 발휘할 때만이 모든 존재는 진정으로 쉴 수 있다. 그래서 고욤나무의 줄기는 불로소득을 꾀하려는 모든 존재들에게 강력히 경고한다. 어떤 존재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경고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