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8·15 광복절을 맞았지만 일본과 북한에 전향적·구체적 제안은 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정상회담 결렬, 남북 통신연락선 차단 등 대외 악재가 잇따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에 대해서도 아무 메시지를 내지 않고 방역·경제 등 대내 메시지를 던지는 데 치중했다.
문 대통령은 15일 서울시 중구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에서 거행된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동독과 서독은 신의와 선의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고 보편주의, 다원주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독일모델’을 만들었다”며 “과거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으로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극복하며 세계의 보편적 가치와 기준을 이끌어가는 EU(유럽연합)의 선도국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록 통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남북이 공존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통해 동북아시아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하게 제도화하는 것이야말로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동북아 방역·보건 협력체’를 소개하며 여기에 북한도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도 재차 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그러나 정부가 최근까지 준비했던 이상가족 상봉, 남북 화상회의 등 구체적인 협력 사업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이 지난달 27일 통신연락선을 재개했을 때만 해도 관계 개선에 기대가 있었지만 지난 10일 연락이 다시 차단되자 섣부른 기대를 접은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반발하던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김영철 노동당 통일선전부장은 지난 11일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엄청난 안보 위기”를 언급하며 도발을 암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떨쳐내고 사실상의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연결될 때 누릴 수 있는 이익은 막대하다”며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꿈꾼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를 넘나들 것”이라고 상상했다. 평화, 통일, 유라시아 등 그야말로 원론적인 대내 메시지만 던진 셈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미래지향적 협력과 과거사 문제 해결을 별도로 풀어가자는 ‘투트랙’ 전략을 유지했다. 특히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가 가장 궁금해 하는 과거사 문제 해법에 대해서도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연설문에서 ‘일본’이라는 단어 사용도 지난해 8번에서 올해 3번으로 줄였다.
앞서 한일 양국은 도쿄 올림픽 개막을 계기로 한일정상회담을 열기 위해 협상을 진행했지만 지난달 19일 결국 결렬됐다. 최근 확산된 양국 국민들 간 반일·반한 감정을 정치·외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정부의 제의를 자국 언론에 계속 흘린 일본 정부의 태도와 소마 히로히사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의 부적절한 발언이 악재로 작용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1945년 8월16일 안재홍 선생의 방송 연설을 거론하며 “해방으로 민족의식이 최고로 고양된 때였지만 우리는 폐쇄적이거나 적대적인 민족주의로 흐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한일 양국은 국교 정상화 이후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기반으로 분업과 협력을 통한 경제성장을 함께 이룰 수 있었다. 앞으로도 양국이 함께 가야 할 방향”이라며 “우리 정부는 양국 현안은 물론 코로나와 기후위기 등 세계가 직면한 위협에 공동대응하기 위한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는 “바로잡아야 할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과 실천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만 말했다.
문 대통령은 구체적 대외 메시지 대신 대내 메시지를 던지는 데 치중했다. 연설문에 ‘꿈’이라는 단어와 ‘세계’라는 단어를 무려 20번씩 사용했다. ‘코로나’라는 단어는 10번 썼고 ‘선진’은 9번, ‘선도’는 7번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이제 선진국이 된 우리는 다시 꿈꾼다. 평화롭고 품격 있는 선진국이 되고 싶은 꿈이다. 국제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나라가 되고자 하는 꿈”이라며 “우리는 지난날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새로운 꿈을 꿀 차례”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