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국 대사관에서 긴급 탈출하라고 공지가 와서 상황이 심각하다 판단했습니다. 추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우방국 대사들과 통화했는데 일부는 받지 않았고, 연결이 된 분들은 대부분 급하게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최태호 주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는 18일 오전 10시(현지시각) 카타르 도하에서 외교부 기자단과 화상 인터뷰에 응하면서 “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양해를 구했다. 헬기에 탑승하기 위해 소지할 수 있는 가방의 규격이 30㎝×30㎝×20㎝로 정해져 양복을 챙기지 못했다는 거이다. 최 대사는 지난 15일 오전 11시 30분께 사설 경비업체로부터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 부대가 수도 카불에서 겨우 2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진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방국 대사관에서 ‘당장 철수하라’는 권고가 나왔고, 정의용 외교부 장관도 현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한국 대사관의 철수를 지시했다.
최 대사는 “철수 결정 후 기본 메뉴얼에 따라 대사관의 주요 문서를 파괴하고 보안 자료도 파괴하고 모든 직원들이 개인별로 짐을 싸도록 지시해서 신속하게 준비를 끝냈다”고 설명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분쟁 지역으로 대사관 내 필요한 물품만 배치된 채 직원들 모두 군인처럼 늘 퇴각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의 수도 카불 장악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최 대사는 “대부분 9월 1일 이후 함락될 것이라고 많이 예상했으나 8월 둘째 주에 긴급하게 우방국 대사관 회의가 소집됐다”며 “그때 8월 30일 이전에라도 철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밝혔다. 오는 19일이 이슬람 축일로 탈레반 부대가 종교적 성과를 위해 공격을 강행할 것이란 관측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항까지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 한국 대사관은 유사시 군용기 등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미국과 양해각서(MOU)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에 대사관 공관원들은 미 대사관까지 차로 5분을 달려갔고, 곧장 헬기를 타고 카불 군용공항으로 향했다. 이때 아프간 군중들도 탈출을 위해 민간공항 활주로에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카불 공항은 철조망 하나 없이 민간 공항과 군용 공항이 붙어 있는 구조다. 이날 저녁 철수하려는 각국 대사관 직원들과 국외 탈출을 시도하는 아프간 국민들로 인해 이내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대사관 직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업을 하는 마지막 교민 1명과 함께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해당 교민은 현지 사업 때문에 좀더 남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최 대사는 “다른 대사관 직원들과 미국 시민권자들이 계속 수속하고 군용기가 떠나 교민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면서 “직원들은 일단 철수하고 저를 비롯한 3명이 남아 교민을 계속 설득해보겠다고 본부에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들도 공습경보로 비행기가 지연된 끝에 현지 시간 오후 7시께 이륙할 수 있었다. 최 대사는 “이날 밤 계속 총소리가 들리고 우방국 헬기가 공항을 맴돌았다"며 "아프간 군중들은 민간공항 활주로를 점거하고 항공기에 매달렸다.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다음날인 16일 최 대사와 공관원들은 사업을 양도하고 온 교민과 함께 군 수송기에 올랐다. 최 대사는 “큰 수송기였고 똑같이 모두 다 바닥에 앉았다. 옛날 배를 타듯이 오밀조밀 모여 앉는 비행기였고 탑승자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한국인은 없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부대가 카불 시내에 검문소를 세워 보행자들을 검색하고 아프간 정부 공무원들의 집을 수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집 지하실에 숨어있거나 계속 도망을 다니는 상황이다. 탈레반이 20년 만에 재집권한 만큼 현재 아프간 인구 대부분이 탈레반의 통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다. 이에 따라 이들이 본보기로라도 잔혹하게 통제될 것이란 우려와 지난 20년 동안 인권 교육을 통해 인식이 높아진 국민들이 거세게 저항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최 대사와 2명의 공관원은 당분간 카타르 대사관에서 업무를 이어가면서 현지 상황을 파악할 예정이다. 최 대사는 “향후 아프간 정권 수립이 어떻게 되는지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면서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에 참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