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을 위한 가석방’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화답했다. 지난 13일 “자신을 둘러싼 걱정과 우려, 기대를 잘 듣고 있다”고 답하며 서울구치소를 걸어 나왔던 이 부회장은 정확히 11일 후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포스트 코로나 대응에 나섰다. 투자와 고용·상생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고루 담은 이번 계획에서는 특히 국가별 대항전이 펼쳐지고 있는 반도체 분야에 강력한 힘을 실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24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가석방 이후 줄곧 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단과 만나 국익에 부응하는 투자 계획을 내놓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석방 당일이었던 13일에도 곧장 서울 서초구의 삼성전자 서초 사옥으로 향해 김기남 삼성전자 DS 부문장(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과 머리를 맞댔다. 광복절 연휴가 지난 다음에는 메모리·파운드리 사업부를 포함한 삼성전자 각 사업 부문별 간담회가 잇따라 열렸다. 출소 전 이 부회장이 구상했을 대규모 투자 고용안에 대한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파운드리 공장 등 투자 속도전
삼성의 이번 투자 결정은 첨단 파운드리 팹 투자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제2파운드리 공장을 비롯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만 향후 3년간 최소 50조 원 이상이 투입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곳곳에서 공격적인 반도체 설비투자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첨단 공정 투자에 속도를 내면서 경쟁력을 가져가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들은 신규 칩 생산 설비 투자에 한창이다. 올 초 인텔은 ‘IDM 2.0’이라는 전략을 들고 나오면서 고객사 칩을 대신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수십 년 만에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2개의 신규 팹을 세우고 이곳에서 첨단 파운드리 라인을 운영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세우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대응해 미국 내 파운드리를 6개까지 늘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공정에서도 상당히 앞서고 있다. 최근 이들은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시험 양산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며 퀄컴·엔비디아 등 굵직한 칩 설계 기업의 파운드리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반면 최근 삼성전자의 투자 소식은 뜸했다. 5월 김기남 부회장이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당시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 미국 현지에 파운드리 투자를 단행한다고 밝혔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이 부회장의 부재로 속도감 있는 투자가 진행되지 못했다. 또 인텔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파운드리 물량을 라이벌인 TSMC가 모두 수주하는 등 생산 경쟁력이 밀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따라서 이번 투자 발표를 기점으로 삼성전자는 파운드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 파운드리 투자 확정은 물론 평택 신규 반도체 팹인 ‘P3’에 첨단 파운드리 라인을 설치하면서 신규 물량 확보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차세대 3나노 공정 확보를 위한 고급 인력 채용에도 공을 들일 가능성 역시 높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TSMC·인텔·UMC·글로벌파운드리 등 글로벌 업체들이 과거에 없던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고, 투자를 많이 한 회사가 힘이 세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선제적 투자를 할수록 경쟁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도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모리 설비투자로 ‘물량 초격차’ 실현
또한 삼성전자는 절대적 우위에 있는 메모리 분야에서 ‘초격차’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사 마이크론은 극자외선(EUV) 공정을 도입하지 않은 10나노 4세대급(1a) D램을 삼성전자보다 먼저 생산하며 세계 최초 기록을 남겼다.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도 후발 주자인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 등이 176단 제품을 개발 완료하며 추격이 거세다.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제품을 먼저 개발해야 ‘차차세대’ 제품을 개발할 비용을 제때 확보할 수 있지만, 후발 업체에 밀리기 시작하면 격차를 유지할 만한 여력을 잃기 쉽다”며 “1a D램 경쟁에서 밀린 삼성전자가 해법을 찾아야 할 시기”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삼성전자는 메모리 분야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를 대폭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반기 양산 예정인 14나노 D램 이후의 EUV D램,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의 양산을 앞당기기 위한 인력 채용과 연구개발비 투자를 고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과감한 메모리 설비투자로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관측된다. 내년 하반기부터 운영할 예정인 P3 메모리 라인을 최대한 신속하게 가동해 마이크론이나 중국 메모리 업체 등이 따라올 수 없는 가격 정책으로 공고한 시장점유율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