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투자로 삼성을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키운 삼성가(家)의 경영 DNA가 되살아나고 있다. 반도체 불모지였던 한국을 세계 1위로 만들어낸 삼성의 저력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중요도가 더욱 높아진 바이오 사업을 향했다. 지난 24일 삼성그룹이 발표한 240조 원 투자 계획은 핵심 사업인 반도체뿐 아니라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방점이 찍혀 있다. 재계는 그룹의 투자 시계를 다시 궤도에 올린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3대에 걸쳐 내려온 경영 DNA를 바탕으로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써 내려갈지 주목하고 있다.
◇‘10년 손해’ 각오한 투자 집념
“10년간 손해를 봐도 좋으니 투자와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1983년 도쿄 선언으로 반도체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힌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말이다. 그는 천문학적인 적자로 기업의 생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동요하는 임직원들을 다독이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개발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인 1984년 64K D램을 처음 출시했지만 앞서가던 일본과 미국 업체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후발 주자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이들의 작전에 삼성전자는 재정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다.
1987년 1메가 D램 양산을 위해 경기도 기흥에 3라인을 착공할 때도 경기 불황 등을 이유로 내부 반발이 거셌지만 이병철 선대 회장은 국제 정세가 반도체 수급 불균형(쇼티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 아래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있다. 서둘러야 한다”며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 5년 만에 흑자를 내는 기업이 됐다. 당시 핵심 장비인 포토레지스트 운송을 위해 4㎞ 도로를 반나절 만에 포장하고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24시간 공사를 추진했던 집념은 오너의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이 시기 삼성전자의 행보에 대해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삼성전자는 과감하다 못해 무모한 투자를 진행해왔다”며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를 내면 일본 업체들이 노하우를 바탕으로 저가 정책을 펼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투자해 기술 격차를 내며 지금의 삼성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규모 설비투자로 메모리 1등 달성
아버지의 뒤를 이은 고(故) 이건희 회장도 적기 투자를 이어나갔다. 특히 그는 현장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판단하는 열린 경영자로 호평받았다. 1989년 4메가 D램의 도입 기술 결정은 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용량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 구조물을 웨이퍼 표면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참호(트렌치)형과 적층 구조(스택)형을 대안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이를 선택해 양산까지 간 업체는 없는 상황이었다. 수율과 공정의 장단점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이때 진대제·권오현 박사가 스택 방식의 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이건희 회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의 결정은 IBM과 도시바·NEC 등 주요 기업들이 트렌치를 택하며 수율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뛰어난 퀄리티의 4메가 D램을 생산하는 기업이 되는 밑거름이 됐다. 미국 시장을 공략해 오스틴에 D램 생산 기지를 세우고 일본 기업들이 추격하지 못하게 기흥과 화성에 대규모 투자를 퍼부어 생산 라인을 크게 늘려 초격차를 구현한 것도 이건희 회장이 내린 결단이었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1990~2000년대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차례로 절대 강자가 됐다.
◇파운드리, 바이오로 신화 이어간다
이재용 부회장은 앞선 이들이 미처 가지 못한 길을 가려하고 있다. 조부와 부친이 이뤄놓은 반도체 분야의 성과를 고도화하는 동시에 ‘뉴삼성’의 성장 축으로서 바이오제약 산업을 키우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회장이 바이오 사업을 집중 육성하기로 한 것은 코로나19 이후 바이오제약 산업이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이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삼성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부족 현상, 백신 수출 제한 등 전 세계적으로 각자도생 기조가 강해지며 ‘바이오 주권’ 확보가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고 자국 내 바이오 생산 시설 존재 여부가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했다”면서 “바이오제약 산업은 고부가 지식산업을 넘어 한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산업이 됐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전문 인력 양성, 원부자재 국산화, 중소 바이오테크 기술 지원 등을 통해 국내 바이오 산업 생태계 및 클러스터 활성화에 나설 방침이다. 실제로 삼성은 바이오 사업에 뛰어든 지 9년 만에 CDMO 공장 3개를 완공하는 등 생산 규모를 빠르게 확장시키고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해야 하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도 대만의 TSMC를 제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오는 2030년까지 171조 원을 투입해 한국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청사진 아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비롯한 설비투자도 진행되고 있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단기간에 비약적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 노하우를 보유한 선단 공정 개발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향후 파운드리 사업은 선단 공정 연구개발(R&D)에, D램 분야는 EUV 공정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설비투자에 공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