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가 오는 2030년부터 수소차와 전기차만 판매한다. 2025년부터는 엔진을 탑재한 신차를 출시하지 않는다. 각국이 탄소 중립 움직임을 서두르자 ‘탈(脫)엔진’의 칼을 빼든 것이다. 빠른 자만이 살아남는 ‘속자생존(速者生存)’ 시대에 혁신을 가속화하겠다는 포부로 읽힌다. 제네시스가 대전환의 포문을 열면서 현대차와 기아도 전동화 시계를 앞당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럭셔리 브랜드로 출범한 제네시스는 완성된 라인업과 뛰어난 상품성으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다”며 “이번 발표는 제네시스의 담대한 여정의 시작점이자 제네시스가 혁신적인 비전을 통해 이끌어갈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려보는 자리”라고 말했다.
제네시스 전동화 전략의 핵심은 연료전지 기반의 수소차와 배터리 기반의 전기차 등 두 모델을 중심으로 한 ‘듀얼 전략’이다. 고출력·고성능의 신규 연료전지 시스템, 고효율·고성능의 차세대 리튬이온배터리 등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제네시스는 2030년까지 모두 8개의 모델로 구성된 수소 전기차와 배터리 전기차 라인업을 완성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40만 대까지 판매를 확대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특히 제네시스 수소차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상용차나 유틸리티차량으로만 출시됐던 수소차가 고급·고성능차로 영역을 넓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제네시스는 또한 원자재와 부품은 물론 생산공정을 포함한 브랜드의 모든 가치사슬에 혁신을 도모해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제네시스는 지난달 이미지를 공개한 첫 전용 전기차 모델 GV60도 선보였다. GV60은 전용 플랫폼 E-GMP가 적용된 브랜드 첫 전용 전기차 모델로, 올해 하반기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와 함께 B필러(앞뒤 문 사이의 기둥)가 사라지고 앞뒤 차문이 서로 마주 보고 반대 방향으로 활짝 열리는 스테이지 도어, 좌석이 회전하는 스위블 시트, 전통 온돌에서 영감을 받은 온열 시스템 등 다양한 미래 콘셉트도 공개했다. 디자인 영역의 확장을 표현한 브랜드 필름 ‘디자인드 포 유어 마인드’도 소개했다. 영상 마지막에는 제네시스의 항공 모빌리티가 등장했다.
제네시스가 현대차그룹 내에서 한발 앞서 전동화 전략을 채택한 데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약진이 한몫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달 현대차와 기아의 판매량이 모두 감소한 반면 제네시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판매량이 265.8% 증가했다. 제네시스는 올해 20만 대 이상 판매가 유력하며 2030년에는 40만 대 이상 판매가 목표다. 올 7월 국내에 출시한 G80 전동화 모델도 누적 계약 2,000대를 돌파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탈내연기관은 완성차 업계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유럽 등에서 탄소 배출 규제가 본격적으로 강화되고 전 세계 주요 정부·지자체들이 내연기관차의 통행을 불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사실상 금지했고 미국은 2030년 미국 내 신차 판매의 50%를 탄소 배출 제로 차량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최대 시장인 중국도 2035년부터 신차의 50%를 전기차로, 나머지 50%를 하이브리드차로 채우기로 방침을 정했다.
주요국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경기 부양책을 내놓는 과정에서 친환경차 분야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 시장이 꽃피는 점도 이 같은 흐름에 힘을 더하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해 30만 대 수준이었던 미국 내 연간 전기차 판매량은 2025년 320만 대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현대차는 2025년까지 5년간 미국에 74억 달러(약 8조 1,400억 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제네시스를 필두로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전동화 시계도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현대차는 2040년까지 유럽·미국·중국 등 핵심 시장에서 제품 전 라인업을 전기차로 채워 시장점유율 8~10%를 달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기아는 ‘플랜S’를 통해 2025년 전기차 11종 라인업을 갖추고 글로벌 점유율 6.6% 및 친환경차 판매 비중 25%를 달성하겠다는 방침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달 6일(현지 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모터쇼 ‘IAA 모빌리티 2021’에서 탄소 중립 비전을 발표할 예정이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는 동남아·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 수요를 고려해 내연기관 역량을 당분간 이어간다는 방침이었지만 예상보다 친환경차 시장이 빠르게 열리면서 전환 시점을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