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5개년 중장기 재정전망(국가재정운용계획)’을 짜는 이유는 매년 발생하는 세입·세출 간 불균형을 중장기적 시계에서 완화하기 위해서다. 가계에 비유하면 올해 경기가 좋지 않아 소득이 줄고 (세입 축소) 가족 중 환자가 생겨 병원비를 많이 썼다면(지출 확대) 당장 이 적자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4~5년에 걸쳐 늘어난 빚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짜보자는 취지인 것이다. 정부도 이 같은 중기 전략 필요성에 공감해 노무현 정부 임기 말인 지난 2007년부터 중기 전망을 작성해 국회에 제출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그동안 관행적으로 경기 전망을 낙관적으로 봐 세수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확장적 재정 지출을 결정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아빠 월급이 내년부터 더 늘어날 것으로 일단 가정해 놓고 예산을 짠 셈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경상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세수의 상관계수는 1에 가까워 정비례하기 때문에 정부가 경상 성장률을 높여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지출을 확대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국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5일 “세율 인상과 같은 궁극적 세수 증가는 국회의 권한이라 정부가 손댈 수 없으므로 정부 권한인 세출 분야에서 구조 조정 방안을 마련해 재정을 건전화하라는 게 중장기 재정 계획의 원래 목적인데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예산 구조 조정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대체로 경상 성장률을 높여 잡아 일종의 착시효과를 낸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작성한 ‘2019~2023년 중기 전망’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물가 상황을 보면 전반적 물가 수준을 의미하는 GDP 디플레이터가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했고 정부가 2019년 중기 전망을 작성한 7~8월(3분기)에는 이 지표가 전년 대비 1.6%나 떨어져 20년 만에 최저치를 나타냈다. 물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올해와 달리 당시에는 저(低)물가와 이에 따른 장기 불황 우려가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2019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간 0.4%에 그쳐 올해 한국은행 전망치(2.1%)보다 1.7%포인트나 낮았다. 그런데도 당시 정부는 이듬해인 2020년 경상 성장률을 3.8%로 잡아 전년(3.0%)보다 1%포인트 가까이 끌어 올리면서 확장 재정의 토대를 마련했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성장률 전망치는 4.1%로 올해 ‘2021~2025 중장기 전망’에서 제시한 2023년도 성장 전망치 4.0%보다도 오히려 0.1%가 더 높다.
기획재정부 출신의 한 전직 관료는 “중기 재정 전망을 짤 때 정부 정책에 따른 긍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선반영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번에는 이런 정책적 효과를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코로나19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핑계로 펑펑 쓰고서는 이제와 나라 살림이 걱정되니 다음 정부에는 세수를 늘리지 못하게 해 지출을 확대하지 못하게 묶어버린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 성장에 디딤돌이 될 재정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내년 지출 증가율(8.3%)은 경상 성장률(4.2%)보다 2배 가까이 높게 잡아놓고 차기 정부에는 예산을 아끼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임기 말 정부가 경상 성장률 전망을 ‘현실화’하면서 재정 정상화 숙제는 차기 정권이 짊어지게 됐다. 국가재정운용계획은 일종의 ‘롤링 플랜(매년 실적을 보아가며 목표치를 변경하는 것)’으로 국회에 계류된 ‘재정준칙’과 달리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고 예산안을 짜기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안도걸 기재부 2차관은 지난달 말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2023년부터는 총지출 증가율을 점진 하향해 2025년부터는 경상 성장률 수준으로 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여당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대출 등 이른바 ‘기본시리즈’로 초대형 예산 지출을 공언한데다 야권 주자들도 대부분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고 있어 재정 계획이 지켜질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설령 차기 정부가 지금보다 복지성 지출을 한 푼도 더 늘리지 않더라도 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한 ‘의무지출’은 매년 평균 6.5%씩 늘어 2025년 342조 7,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예산에서 의무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46.1%에서 2025년 49.6%로 증가하게 된다. 정부가 연구개발(R&D) 등 미래 먹거리를 위해 쓸 수 있는 돈(재량 지출)의 비중이 그만큼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오문성 한양여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정부가 비효율적 예산 집행을 크게 늘리면서 우리나라 재정 건전성이 나빠졌다”며 “차기 정부도 구조 조정에 실패한다면 국가 신용등급 하락과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