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서해에서 북한군 총격에 사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사생활을 ‘월북의 근거’라며 상세히 공개했다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 침해’ 판단을 받은 해양경찰청이 여전히 “국민 알 권리를 위한 발표”라는 입장을 고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유족들은 인권위 결정대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관련자를 문책하라고 촉구했으나 김홍희 해경청장은 후속 조치에 대한 사실관계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관련기사> [단독] "北 공무원 피격 정보공개" 요구에 靑 "한반도 평화 침해"...20일 7개월만 첫 재판
9일 서울경제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김 청장은 지난 7일 유족들에게 “해경의 수사 발표는 그간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확인된 사실을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발표한 것이며 명예를 실추할 의도는 없었다”는 내용의 민원 답변서를 발송했다. 김 청장은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께서 아픔을 느낀 부분이 있었다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해명을 요구한 부분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으로 구체적 사안에 대해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 다른 기관으로의 이관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이 답변을 이날 우편으로 받았다.
유족들은 앞서 지난달 17일 인권위 판단에 따라 해경이 사과와 해명을 해야 한다며 김 청장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인권위가 지난 7월7일 “해경이 해수부 공무원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인의 사생활을 상세히 공개하고 ‘정신적 공황 상태’라고 표현한 행위는 피해자와 유족의 인격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음에도 해경 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유족 측은 내용증명에서 “인권위 판단이 나온지 한 달이 훨씬 넘었음에도 해경은 유족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며 “해경이 허위로 발표한 이유를 6하 원칙에 따라 명확히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또 “관계자들을 경고 조치했는지 알려 달라”며 “사건 발생 후 11개월 넘게 수사 중인데 제3의 기관에 수사를 이관하라”고 요청했다. 김 청장은 사실상 이에 모두 거절 또는 침묵의 입장을 보인 것이다.
해경은 7월 인권위 조사 당시에도 "도박 횟수·금액·채무 상황을 밝힌 것은 월북 동기를 밝히기 위한 불가피한 설명”이라며 국민 알 권리 충족 차원의 조치였다고 맞선 바 있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 논리를 배척했다. 인권위는 해경이 2차 중간수사 당시 피살 공무원의 도박·채무액을 2배 이상 부풀려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또 해경이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도피의 목적으로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발표한 데 대해서도 일부 전문가의 의견일 뿐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인권위는 김 청장에게 당시 해경 수사정보국장과 형사과장을 경고 조치하고 직무교육 등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일부 언론에서 피해자의 채무 상황 등에 대한 추측 보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에 대한 공개가 정당화될 수 없다”며 “실종 동기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수사의 필요성과 수사의 공개 대상은 완전히 별개”라고 꼬집었다.
피살된 공무원의 형 이래진씨는 서울경제와의 전화통화에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짧은 답변문에 사과도 없고 사실관계 확인도 없다”며 “바로 청와대에 항의할 것이고 다음 정권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살인방조 혐의로 형사 고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유족 측은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국방부 장관, 해양경찰청장을 상대로 정보 공개 청구 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도 청와대와 정부 측은 “한반도 평화 증진, 군 경계 태세 등 국익을 현저히 침해할 수 있다”며 정보 공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