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간)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한·북한·미국·중국 간 ‘종전 선언’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한 것은 임기가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북 문제만큼은 반드시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절박감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실무 차원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보텀업’ 방식으로 대화에 별 진전이 없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시 남북미가 보여줬던 정상 간 ‘톱다운’ 방식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주변부에 있었던 중국까지 언급한 것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3자 또는 4자 회담의 계기로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날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 가운데 북한과 관련된 내용은 총 22문장으로 전체의 4분의 1이나 차지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종전 선언을 이뤄낼 때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문 대통령의 기조연설 때 북한 대표부 자리에는 3등 서기관이 앉아 연설을 경청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김성 주유엔 북한대사의 연설은 일반 토의 마지막 날인 오는 27일에 예정됐다.
대다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의에 대해 “실효성이 낮다”는 의견을 밝혔다. 북한이 핵 시설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는 국제 보고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북한 문제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더욱이 코로나19 상황, 격화되는 미중 갈등,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도발과 모욕적 담화까지 고려하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등을 계기로 당사국들이 모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었다. 무엇보다 비핵화 방법론에 대한 북미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종전 선언 동참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한에 비핵화 움직임도 없고, 미사일을 쏘며 미국과 회담도 안 하는데 문 대통령이 원론적인 얘기를 했다”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제안에 각국 정상들이 협의체를 만들거나 대화를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차기 정부가 계승해야 한다는 국내 메시지 성격이 더 강해 보인다”고 해석했다. 김연주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평화는 선언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비핵화를 향한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실천적 제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의 과감한 제안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은 같은 날 북한의 인권 상황 개선과 외교적 해법에 방점을 찍은 연설을 내놓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란이 핵 합의를 완전히 준수할 경우 미국도 그럴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추진에도 진지하고 지속적인 외교를 모색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할 실제적 약속과 시행 가능한 계획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구체적 진전을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화 재개의 조건을 내건 셈이었다.
문성묵 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종전 선언에는 구속력이 없는 데다 선언 이후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할 수 있다”며 “종전 선언으로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는 없는데 문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과의 협의 아래 나온 것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미국 국무부는 유엔총회 기간인 22일(현지 시간) 뉴욕 팰리스호텔에서 한미일 외교장관이 만날 예정이라고 이날 전했다. 회담에서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영변 원자로 재가동, 우라늄 농축 가능성 등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 바이든 대통령의 대북 외교 진전 방향에 대한 후속 논의도 자연스럽게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고위 당국자는 브리핑에서 “(한미일) 장관들이 (3자 회담에서)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 번영 증진과 수호에 대한 약속 및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한미일 협력의 국제적 범위를 강조할 것”이라며 "지난주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시험을 감안하면 3자 회담은 시의적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