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현대차그룹이 투자한 미국 자율주행 기업 모셔널이 일반 도로에서 운전자 없는 자율주행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쳐 화제가 됐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된 시험 주행에서는 여러 대의 무인 자율주행차가 교차로, 비보호 방향 전환,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가 있는 혼잡한 도로를 지났다. 일반적으로 무인 자율주행차 시범 주행에는 경로 확인과 비상 정지 등을 위해 운전석에 안전 요원이 탑승하지만 이번 모셔널 시험 주행에는 안전 요원이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율주행 시험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는 2018년 ‘자율주행차 분야 선제적 규제 혁파 로드맵’을 발표하고 자율주행 등 미래차 규제 완화에 나서왔다. 운전자 개념을 ‘사람’에서 ‘시스템’으로 확대하고 자율주행차 안전기준을 마련하며 각종 보험 규제를 정비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규제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임시 허가에 그칠 뿐 과감한 규제 개혁에는 손을 놓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무선업데이트(Over The Air·OTA) 기능이다. 미래차의 핵심 기능이 될 OTA는 정작 국내에서는 불법이다.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OTA는 점검·정비로 분류되며 이 작업은 정비 사업장에서만 가능하다. 불법 정비로 인한 안전사고를 막자는 취지의 규제지만 소프트웨어가 차량의 주요 요소로 부각되는 미래차 시대에는 걸맞지 않은 규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OTA는 자율주행 기능, 운전자 보고 기능 개선 등에 활용할 수 있고 업데이트 내용이 클라우드에 저장되며 직접 정비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등 편리한 점이 많다. 테슬라가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도 OTA 기능 때문이다. OTA를 통해 소비자들은 매번 새로운 차를 타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도 OTA 기능을 일부 허용하고 있지만 한시적인 허용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최근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OTA 서비스 임시 허가를 승인했다. 이로 인해 볼보·BMW 등이 일부 OTA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현대차도 조만간 출시할 GV60에 OTA 기능을 처음 탑재한다. 하지만 OTA 서비스를 원하는 완성차 업체가 개별적으로 승인을 신청해야 하는 데다 허가 기간이 2년에 그치고 당초 허가받은 서비스보다 더 진화된 새 기술 도입 시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소비자 대다수가 원하는 서비스인데도 당국은 여전히 ‘규제’라는 틀 안에 갖혀 있는 것이다.
자율주행 관련 규제도 여전히 벽이 높다. 미국 네바다주는 일정 요건만 충족되면 고속도로는 물론 일반 도로에서도 자율주행 실험이 가능하다. 아우디·BMW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자율주행 시험을 위해 네바다주로 몰리는 이유다. 현대차가 합작사인 모셔널을 매개로 주로 미국에서 자율주행차 개발을 진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은 차량 공유 서비스가 완전 개방돼 있어 모셔널은 차량 공유 업체인 리프트와 손잡고 상업용 로보 택시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세종 등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인 자율주행 시험이 가능하다. 자율주행 기술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주행을 통한 데이터 축적이 필요하지만 현 상태로는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또 차량 공유 서비스가 사실상 금지돼 있어 자율주행과 연계된 서비스 출시도 쉽지 않다.
원격주차 가능 거리가 6m에 불과하고 배터리 낙하 인증 기준 등이 외국에 비해 까다로운 점 등도 우리 정부가 여전히 산업을 ‘혁신’이 아닌 ‘규제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로 꼽힌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현 정부가 미래차 관련 규제를 조금씩 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규제 강도가 높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뿐 아니라 부품 기업에 대한 과감한 연구개발(R&D) 지원, 경직된 노사관계법 개선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행법상 미래차 전환을 위한 인력 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해외 공장 투자, 생산 라인 조정, 온라인 판매 등에 일일이 노조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단체협약 규정 등은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자율주행차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 육성을 위한 입법이 맹탕에 그치고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 정부는 최근 반도체 관련 규제를 없애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국가핵심전략기술법을 마련했으나 입지 및 환경, 대학 정원 등 산업계가 요구하는 핵심 규제 개혁은 대부분 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