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인류가 '퇴보'를 의심할때…숫자는 '진보'를 가르킨다[책꽂이]

■지금 다시 계몽-스티븐 핑커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불평등·환경 등 비관론 팽배하지만

인권·수명·지식·빈곤률 데이터는

계몽주의 출현 이후 지속적 개선

인간 본성이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이성·과학 있는한 희망적' 설파








기후 위기 탓에 지구 멸망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8억 명이 기아로 고통 받는 와중에 세계 식량 생산량의 3분의 1은 버려진다는 통계도 있다. 예상 못한 치명적 신종 바이러스가 걸핏하면 출몰해 사람들을 집단 죽음으로 몰아간다. 심지어 중세 시대도 아닌데 21세기에 버젓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강간, 살인, 전쟁 같은 잔인한 폭력이 자행된다. 날마다 쏟아지는 끔찍하고 우울한 뉴스에 지친 사람들은 어느새 인류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주장에 무기력하게 동의하고 만다. 이때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으며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하려 나선 이가 있다. 세계적 사상가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다. 그가 비관론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864쪽에 달하는 ‘벽돌 책’을 내밀었다. 2018년 미국에서 출간돼 국내에는 이달 초 번역 출간된 ‘지금 다시 계몽’이다.

핑커 교수는 책에서 각종 데이터를 근거로 인류의 삶은 태초 이래 계속 진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도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세상은 계속해서 더 나아질 것이라고 설파한다. 전작인 세계적 베스트셀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2년)’에서처럼 그는 역사의 진보를 추동해 온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대한 믿음을 이번에도 강하게 보여준다. “인간 본성은 결함투성이지만 그 안에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씨앗들이 담겨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Rose Lincoln / Harvard University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Rose Lincoln / Harvard University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계몽주의의 핵심 이념을 설명한 1부 ‘계몽’에서 핑커 교수는 칸트의 1784년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소환한다. 칸트는 계몽에 대해 “인류가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나 종교적·정치적 권위의 도그마와 인습에 나태하고 소심하게 복종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칸트가 내세운 ‘감히 알려고 하라’는 모토에 따라 계몽주의자들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신념으로 삼고 이성과 과학에 기반 한 지식 탐구와 통찰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오류는 시정 하고 지식은 더 늘렸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계몽주의 출현 이후 인류의 삶이 급격히 나아지게 된 추동력이라고 핑커 교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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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진보’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뉴스에 빠져 인류가 퇴보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부정적 사건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 인지 편향성 탓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생명, 건강, 식량, 부, 불평등, 환경, 평화, 안전, 테러리즘, 민주주의, 평등권, 지식, 삶의 질, 행복, 실존적 위협, 진보의 미래 등의 하위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 관점을 데이터에 근거에 반박해 나간다.



가령 오늘날 예상 못한 질병·사건·사고가 늘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늘고 있는 듯 보이지만 2015년 기준 세계 평균 기대 수명은 71.4세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기대 수명이 35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오늘날 영유아 사망률이 1950년보다 높은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최근 폭력에 관련된 사례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믿지만 통계상 미국 내 폭력은 감소세를 보인다.

핑커 교수는 세계적 화두인 부(富)와 불평등에 대해서도 데이터를 내세워 과거보다 나빠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핑커 교수는 “불평등과 빈곤을 혼동하는 것은 총량 오류, 즉 부를 제로섬 방식으로 나눠야 하고, 따라서 더 많이 갖게 된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더 적게 갖게 된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실상은 산업혁명 이후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이에 따라 부유층 뿐 아니라 빈곤층도 더 많은 것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계산한 국제 지니계수 곡선 등을 거론하며 산업혁명 이후 불평등 역시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핑커 교수는 “불평등 축소가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라며 “경제적 불평등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는 것은 전염병, 전쟁, 격렬한 혁명, 국가 붕괴”라고 지적한다.

3부에서는 핑커 교수가 가장 아끼는 가치인 이성, 과학, 휴머니즘을 다룬다. 성난 포퓰리스트와 종교적 근본주의자, 허무주의에 빠져 진보 가능성을 부정하는 지식인들에 맞서 계몽주의 사상의 가치를 적극 변호하고 설파한다.



그의 설명대로 시간적·공간적 데이터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면 세상은 계속 나아졌고, 지금 이 순간도 더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순간 삶을 힘겨워 하는 개개인의 ‘생각과 자세가 틀렸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 핑커 교수의 말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관점에서 본 삶의 개선이고, 역사의 진보이기 때문이다. 5만 원.


정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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